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기획/특집

전주․완주 110景 38> 은송선교隱松宣敎-은석동학隱石洞壑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6.04.07 09:20 수정 2026.04.07 09:20

▮필자= 정복규 언론인
▮그림= 정미정 작가

75. 은석동학(隱石洞壑)
○…산과 내 둘러친 경치 좋은 은석골
↑↑ 은석동학

은석동학(隱石洞壑)은 ‘은석골 일대의 경치’를 말한다. 동학(洞壑)은 동녘 동(東), 골짜기 학(壑)은 ‘산과 내가 둘러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을 뜻하며 동천(洞天)이라고도 한다.
은석골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에 있다. 전주에서 남원 쪽으로 6km 쯤 가다보면 전주천 건너편에 고덕산 줄기의 은석골이 있다. 옛날부터 한증막으로 유명해 피서객이 발길이 줄을 잇는 곳이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룬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방천을 낀 은석제의 물이랑이 시원스럽다.
파수대, 만궁봉, 관혁봉 등 우뚝 솟은 기암괴석에 묻힌 산허리 골짝마다 석간수가 흐른다. 석간수를 따라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의 정취에 동화된다고 하여 은석동학(隱石洞壑)이라고 했다. 호반을 따라 돌길로 돌아 오르면 풍요롭고 요염한 도원경을 이룬다. 그 옛날 병자호란 때 투숙객은 이곳 정취를 상찬하여 석지정, 제월정 등을 짓고 천엽동 만수동이라 불렀다.
그밖에 낙지암, 도량 유지를 끼고 돋아난 쇄월대, 학소대, 선운대, 월영대, 모란대 등의 봉우리들이 널려 있다. 운귀암, 월태암, 나한암, 무영암 등 주변은 예부터 운치골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은석골 주변의 수박동, 잉어소, 박모산 등은 박 진의 효성이 젖은 곳이다. 죽음골은 또 완주군 상관면 돌안을 들춰 삼승반촌이요 칠정지로 알려진 곳이다.
여름철 수많은 피서객이 찾아드는 은석골은 계곡의 맑은 물도 유명하다. 발원지를 떠난 전주천은 완주군 상관면의 만마관(萬馬關)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한데 합쳐져 급한 물살을 이룬 채 전주 쪽을 향하다가 색장동(塞墻洞)에 다다른다. 원색장마을, 죽음(竹陰)마을과 함께 색장동을 구성하는 은석골 앞에서 전주천은 유유히 흘러 나간다. 명문장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이곳을 가리켜, 일곱 정자 아랫마을은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땅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역사 속의 인물 정여립의 비극이 깃들여 있는 곳이다. 인백(仁佰)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전주 남문 밖 자만동(현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 한뎃벌, 전주 한벽루 상류)에서 동래정씨(東萊鄭氏) 첨정(종4품) 정희증(鄭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연도는 명확치 않으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중종-인종 연간으로 추정된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전주남문 근교에 살았다. 정여립은 청소년 시절에 익산군수였던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여 간혹 일을 처리할 정도로 영특하고도 조숙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전들은 군수보다는 그의 아들 정여립을 더 어려워했다.
그는 1570년 (선조 4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서울에서 율곡 이 이, 우계 성 혼 등 당대 석학들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해 있는 해박한 지식을 일찍부터 인정받았다.
1580년(선조 14년)에 예조좌랑, 1583년에 홍문관 수찬(修撰) 벼슬에 올랐으나 정여립은 당파 싸움의 틈바귀에 끼여 울적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벼슬길을 버리고 젊은 나이에 전주로 낙향했다. 그는 고향 마을에서 가까운 죽음마을 앞 파수대(把手臺)에 거처를 정한 다음 산천경개를 벗 삼으며 후학들에게 경학을 가르치는 일로 소일했다. 그 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상경한 정여립은 재차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갈수록 우심해지는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또다시 벼슬길을 버린 채 낙향하고 말았다.
낙향 후 그는 진안의 죽도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길렀고, 그의 문하생들은 그를 가리켜 ‘죽도선생’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높은 명성을 듣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강호의 명사 및 인재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신분의 귀천을 두지 않고 사귀기 위해 그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바로 그 대동계원들이 매월 보름날 한자리에 모여 말을 달리고 활을 쏘고 창과 칼을 쓰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곳이 바로 은석골을 중심으로 파수대, 관혁봉, 만궁봉 등을 아우르는 일대이다.
정여립의 대동계는 1587년 왜구가 전라도 해안지방을 침노하여 노략질을 일삼을 때 전주판관 남언경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 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 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항간에 구전되던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이라는 도참설로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치부된다. 그의 대동계 조직도 조정에서 그에게 역모의 혐의를 씌우는 데 결정적인 증거로 이용된다. 결국 일세의 풍운아 정여립은 은석골 파수대에서 갈고 닦은 경륜을 나라를 위해 제대로 한 번 펴보지도 못한 채 역모의 수괴로 몰려 쫓긴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 준과 안악군수 이 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1589년 진안 죽도의 농막에서 그 파란 많았던 생애를 자결로 끝맺고 말았다.
정여립은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 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는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

76. 은송선교(隱松宣敎)
○…개신교 최초 전주 포교지 은송리 마을
↑↑ 은송선교

은송선교(隱松宣敎)는 조선말 전주에서 초창기 전도활동을 벌인 완산칠봉 아래 은송리 마을을 말한다. 전주 성문 밖 은송리는 현재 완산초등학교 부근이다.
1832년 독일인 구츠라프에 의해 처음 소개된 개신교가 전주에 들어와 포교하기 시작한 것은 1893년 여름의 일이다.
“1893년 여름 리눌서 목사가 정해원씨를 전주에 보내어 전도도 하고 선교사가 묵을 집을 사게 함으로써” 전주에서의 개신교 활동이 시작된 곳이다. 그해 6월 전주에 온 정해원은 은송리에 26달러를 주고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전도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9월에는 테이트와 전킨이 전주에 머물면서 향후 선교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당시 테이트 등이 전주에 묵고 있을 때 ‘양반만이 살고 있는 전주 땅에서 양인들은 물러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양반도 있었다. 서양 귀신을 쫓아낸다는 ‘축귀양인(逐鬼洋人)’ 네 글자를 등에 써 붙이고 다닌 사람들도 있었다.
1894년 3월 테이트 등이 전주에 정착하면서 본적적인 선교활동에 들어가지만, 곧이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때문에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직후 1895년 2월 레이놀즈와 테이트 일행은 은송리 초가집을 다시 마련한 뒤 그해 11월 선교활동을 재개하였다. 같은 해 처음으로 호남 최초의 개신교회인 전주 ‘서문밖교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초창기 선교는 의료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전주에 처음 들어온 선교의사는 해리슨이었다. 예수병원은 1898년 미국에서 온 여의사 마티 잉골드(Dr. Mattie B. Ingold)에 의해 시작되었다. 잉골드 박사는 은송리에 조그만 집 한 채를 구입하여 어린이와 여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잉골드는 은송리에 여성을 위한 진료소를 차려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잉골드의 진료는 4개월 만에 400여명의 환자들이 몰려왔을 정도로 평판이 높았다. 1902년 선교부 대지 위에 1000달러의 기금을 투자한 전주병원이 해리슨과 잉골드의 노력으로 건립되어 오늘의 예수병원에 이르고 있다.
1935년에 세워진 구 예수병원은 붉은 벽돌건물이었다. 전북지역 근대 건축물 중 처음 지어진 건물이다. 외관의 흉측한 변형 없이 당당하고 실용성 있는 보기 드문 유산이다. 1970년대까지 예수병원이 사용하다 1971년 학교법인 우석재단이 인수, 1990년대까지 우석한방병원으로 사용됐으며 1998년부터 현재 엠마오사랑병원으로 쓰이고 있다.
구 예수병원(현 엠마오사랑병원)은 본관과 엠마오너싱홈, 사택 등 크게 세 건물로 구성돼 있다. 본관은 1935년 지어졌고 본관의 오른쪽 부분이 1950년에 증축됐으며 너싱홈은 1949년 세워졌다. 각 건물마다 건립연도가 새겨진 초석이 있다. 서양식 건축물인 이들 건물 중 특히 본관은 여름이면 건물 외벽으로 담쟁이넝쿨이 파릇한 잎을 무성히 틔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면에서 보면 2층이지만 뒤쪽에서 바라보면 5층짜리 건물이다. 너싱홈은 뒤에 지어졌지만 본관과 같은 건축 재료와 양식으로, 주 출입구인 아치형 현관을 돌출시켜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외양을 갖고 있다. 관문의 아치형 처리는 건물 내부에서도 볼 수 있다.
개신교는 의료선교 뿐만 아니라, 근대 학교를 설립 교육선교를 병행하였다. 1900년 9월 9일 당시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1867-1951)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택에 신학당을 열고 학생 1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교육선교의 시초이다.
1904년 서원너머 윌리엄 잰킨스 집으로 옮겼다가 1906년 현재 신흥학교 자리에 있던 희현당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1909년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옛 희현당 자리에 벽돌 2층 양옥 건물을 지어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1909년 9월 신흥학교 강당자리에 기와집 8칸을 신축하여 학교이름을 신흥학교라 하고 선교사 유서백이 교장으로 취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편 1904년 9월 1일 전킨이 한국 여성에 대한 교육을 위해 서원 너머에 학생 10명을 모아 여자청년학교라는 명칭으로 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기전학교의 전신이다.
예수병원 어린이집 부근에는 선교사들의 묘소가 있다. 선교사 랭킨(David C. Rankin)은 미국 남장로회 선교본부 협동총무로 1902년 12월 초 아시아 선교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중국과 일본을 거쳐 내한해 먼저 평양에 갔다가 폐렴에 걸려 12월 28일 별세하였다. 해리슨(Linnie D. Harrison)은 1892년 남장로회 개척 선교단원으로 내한하여 전주에서 환자 심방을 갔다가 열병에 전염되어 1903년 6월 19일 별세했다.
전킨(W.M.Junkin)은 군산에서 일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04년 전주로 옮겼다. 그 후 “전주 6마일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선교부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지방 순회를 감행하다가 결국 장티푸스에 폐렴이 겹쳐 1908년 1월 2일 별세하였다.
전킨 묘비 앞에 벽돌같이 생긴 조그만 돌 세 개가 나란히 박혀 있는데, 시드니(Sidney), 프랜시스(Francis), 조지(George)의 묘비석이다. 어려서 군산에서 죽은 전킨의 세 아들의 묘비석인 것이다. 전킨 가문의 ‘4부자’가 함께 묻힌 셈이다.
전주시 서완산동 145번지 전주 유일의 일제 강점기 양관은 예수병원 의사와 간호원 사택으로 지어졌다. 이 집은 스미스 선교사를 마지막으로 주인 없이 비워두었는데, 그 때 “빈 집을 지키며 돌봐 주겠다”라는 사람이 나서 그에게 집 관리를 맡겼다. 그는 그 집의 시설 일부를 개조해 독서실(고시원)을 차리고 지금까지 3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소유권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저작권자 시사전북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