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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전주․완주 110景 37> 위봉폭포威鳳爆布-유연낙조油然落照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6.03.07 11:16 수정 2026.03.07 11:16

▮필자: 정복규 언론인
▮그림: 정미정 작가

73. 위봉폭포威鳳爆布
○…완산승경 중 한 곳으로, 전주 8경
↑↑ 위봉폭포. 그림 정미정 작가

위봉폭포(威鳳爆布)는 완산승경 가운데 하나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위봉마을의 추졸산에 있으며 빼어난 절경으로 유명하다. 인근에는 위봉산성(威鳳山城)과 위봉사(威鳳寺)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위봉폭포는 전주팔경의 하나이기도 하다. 폭포의 높이는 60m, 폭은 3m에 이르며, 2단으로 물줄기가 쏟아지는 폭포이다. 위봉폭포는 자연석으로 이뤄진 폭포로 소나무·느티나무·야생화에 둘러싸여 장관을 이룬다.
위봉폭포는 완주 송광사에서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가다 보면 오르막길 깊은 골짜기에 파묻혀 있다. 차를 주차해 놓고 오르막길로 50여m를 걷다보면 조금씩 가려져 있던 폭포의 모습이 드러난다. 제법 솟아 있는 큰 바위에 올라서서 폭포를 바라보면 그 모습이 무척 시원스럽다.
위봉폭포와 가까운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을 기념하는 웅치전적지(전라북도기념물 제25호)와 종남산 기슭에 송광사가 있다. 하류에는 동상저수지, 대아저수지, 화심온천 등이 있다.
위봉산성(威鳳山城)은 조선 숙종 원년(1675)에 7년의 세월과 7개 군민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다. 전주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의 영정과 전주이씨 시조의 위패를 유사시에 보관하기 위하여 전주에서 가까운 험한 지형을 골라 성을 쌓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주부성이 동학군에 의해서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이곳에 피난시킨 적도 있었다.
이 성은 높이 4∼5m, 길이 16㎞로, 3개의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이란 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하여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을 가리킨다. 성안에는 4∼5개의 우물과 9개의 못을 팠고, 군대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지금은 일부 성벽과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그 위에 높이 3m의 아치형 성문이 있다.
위봉사(威鳳寺)는 완주 송광사에서 가파른 고개 길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야 나온다. 위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1912년에는 전국 사찰 30본사의 하나로 52개의 말사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보물 608호인 보광명전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69호인 요사와 삼성각만이 남아있다.
전주에서 26㎞ 거리에 자리 잡은 위봉사는 604년(백제 무왕 5)에 서암대사(瑞巖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극락전중수기(極樂殿重修記)에 전설적인 설화가 실려 있을 뿐이다.
이에 따르면 신라 말 서민 출신인 최용각(崔龍角)이 말을 타고 전국 산천을 유람할 때였다. 봉산(鳳山) 남쪽에 이르러 등나무 덩굴을 잡고 겨우 산꼭대기에 올라가니 어떤 풀 섶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가 보니 거기에는 세 마리 봉황새가 노닐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짓고 봉황의 이름을 따서 위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위봉사는 1359년(고려 공민왕 8년)에 나옹화상이 대가람으로 중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 6·25 한국전쟁과 여러 차례의 화재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다시 1988년부터 증․개축을 했으며, 지금은 전북을 대표하는 비구니선원으로 위상이 커졌다.
위봉사의 넓은 입구 마당에 들어서면 일주문이 있다. 대개의 일주문들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곳은 팔작지붕으로 몸체에 비해 지붕이 거대한 모습으로 보인다. 특히 돌계단 위에 있어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돌계단을 올라 일주문을 지나면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을 거쳐, 봉황이 산다는 전면 5칸의 우람한 누각인 봉서루(鳳棲樓)의 밑을 지나게 된다. 정면에 는 위봉사의 중심건물인 보물 608호인 보광명전(普光明殿)이 나온다. 경내에는 목조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 등을 모신 나한전이 있다. 극락정토를 표방한 구천오백존불탱 등이 봉안되어 있고, 또 다른 아미타좌상을 모신 극락전 등이 있다.
위봉사에서 위봉폭포를 거쳐 구불구불한 길을 계속 내려가면 곧바로 완주군 동상면에 이른다. 동상면의 저수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게 되면 진안군 주천면에 있는 운일암․반일암계곡이 나온다. 왼쪽 방향으로 가게 되면 대아리 저수지가 나온다. 대아리저수지의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가다 왼쪽 방향으로 가게 되면 전주가 나온다. 오른쪽 방향으로는 대둔산을 거쳐 대전으로 가게 된다.
한편 완주군 소양면 화심마을에서 좌회전하여 동상면 쪽으로 가면 대승마을이 나온다. 이곳의 도로 건너 맞은편 산에 만육공(晩六公) 최 양(崔瀁)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만육공이 은거했던 곳이다.
소양면(所陽面)은 옛날에는 ‘소왕면(小王面)’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소왕은 곧 작은 왕국이라는 의미이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인 최 양(1351∼1424)은 전주 최씨로 호는 만육이며, 정몽주의 생질이다. 고려 말 우왕 2년(137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던 대학자로, 외삼촌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격살되자 소양면으로 숨어 들어와 살았다. 그 뒤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한 후 수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최 양을 불렀다.
그러나 최 양은 끝까지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태종은 이 일대의 땅을 하사해 주고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용연마을 앞 천변에서 보면 멀리 신왕리(新王里), 왕정리(王停里)라는 마을이 보이는데, 이 마을들이 이와 관련된 지명이다. 새 왕의 사신이 온 곳이라고 하여 신왕리라고 하였으며, 왕의 사신이 머문 곳이라고 하여 왕정리라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소양면을 작은 왕국을 뜻하는 ‘소왕면’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최고집’이라는 말도 바로 만육공의 절개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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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유연낙조油然落照
○…전주천을 끼고 진북사에 이르는 잔등
↑↑ 유연낙조. 그림 정미정 작가

유연낙조(油然落照)는 ‘유연대에 해지는 저녁노을 모습’이다. 낙조(落照)는 떨어질 낙(落), 비칠 조(照)는‘저녁노을’을 의미한다.
유연대(油然臺)는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신흥중고등학교 뒤에서부터 시작하여 도토리골과 어은골을 거쳐 진북사(鎭北寺)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뻗친 고만고만한 표고의 산줄기를 가리킨다. 완산칠봉 동남 기슭의 우람한 산악이 포물선을 그으며 전주천의 물살을 끼고 진북사(鎭北寺)에 이른 잔등이 바로 유연대이다.
‘유연(油然)’이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모양’ 또는 ‘저절로 일어나 형세가 왕성한 모양’을 뜻한다. ‘잘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양’, ‘다른 것에 개의치 않는 태연한 모양’도 해당된다. ‘여유 있고 침착한 모양’, ‘속에 담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모양’을 말하기도 한다.
유연대는 자유자재하고 능소능대하면서 스스로 조화를 부리는 산줄기 같기도 하다. 유연대는 사실 뭉게구름처럼 왕성하게 피어난 아름답고 귀중한 것들을 속에다 감춘 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능청을 떨어온 겸손한 산이다. 어은골(魚隱골) 역시 마찬가지여서 잉어 같은 대어를 품안에 숨긴 채 유연대 산자락 안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수줍은 땅이다.
다가산(多佳山) 너머에 천양정의 전신인 다가정이 있다. 다가정에서 화산공동묘지를 넘어가는 고개를 강당재라고 한다. 강당(講堂)은 유생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지어진 집을 의미한다. 이전 시기에 이곳에 강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못하였다. 다가산과 유연대 사이를 선너머라 부르는 까닭은 화산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연대에는 조선시대 주요 건축물인 희현당이 있었다.
유연대 일윈에는 각급 교육기관들이 다수 자리를 잡고 있다. 예수간호대, 기전대, 한일신학교, 신흥중고, 기전여중고, 전주여상 그리고 그 너머의 근영여중고 등이 그것이다. 유연대가 온고을(전주)에서 교육의 기능을 떠맡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유연대에는 호남의 인재를 양성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연대 남쪽 산자락 화산동에는 한때 전주향교가 있었다. 그러나 부성에서 너무 거리가 먼데다가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옛 법도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1673년(선조 35년)에 교동으로 향교를 옮겼다. 그 후 1624년(인조 2년)에 향교 자리에 화산서원(華山書院)이 창건되었다. 화산서원은 전주부윤을 지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전라관찰사를 지탠 규암(奎菴) 송인수(宋麟壽)를 배향하여 그들의 높은 학문과 덕망을 오랫동안 기려왔다. 그 뒤 1869년(고종 6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폐지되었다. 옛날 서원이 있던 자리에 세운 '화산서원비' 는 1984년 지방문화재 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유연대는 제도와 규모를 갖춘 고등교육 기관인 희현당(希顯堂)도 거느리고 있었다. 희현당은 1700년(숙종 26년) 당시 관찰사 김시걸(金時傑)이 생원과 진사들의 모임 장소였던 사마재(司馬齋) 자리(현재의 신흥고교 자리)에다 창설한 학당이다.
이 학당에는 강당과 도서를 마련하고 당규(堂規)를 제정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주방을 마련하여 서생들의 숙식을 돕는 등 오늘날의 학교제도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해마다 봄 반과 가을 반으로 나누어 전주에서 10명, 도내에서 20명, 도합 30명의 학생을 선발해서 교육을 시켜왔다.
그 후 희현당은 오랜 사색당쟁의 여파로 운영 주체인 선비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바람에 퇴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1907년에 미국인 선교사 레이놀즈 부부에 의해 근대식 교육기관인 신흥학교가 창설되면서 한때는 희현당 시설이 신흥학교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구한말 전라감사로 부임한 매국노 이완용이 희현당 자리를 명당이라 하여 제 조상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욕심을 냈다. 결국 귀중한 문화재로 남아 있던 희현당 건물은 그나마 아예 헐리고 말았다. 현재 신흥학교 남쪽에는 1707년(숙종 33년)에 세운 ‘희현당 사적비’와 1743년(영조 19년)에 세운 ‘중수사적비’가 남아 있다.
유연대에는 이영남(李英男) 장군 사당도 있다. 이영남은 약관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수군 소속으로 원균의 휘하에서 싸워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에 의해 참모로 발탁된 다음 그의 휘하에서 한산도, 부산포, 당항포 해전에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수훈을 세웠다. 이영남은 정유재란 당시 옥고를 치르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에 의해 가리포 첨절제사 겸 조방장으로 임명되었다.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이듬해 노량대첩에서 이순신과 함께 28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전사했다. 사후 이영남은 병조판서에 추증되는 한편 예수병원 근처에 있는 선충사(宣忠祠)에 제향되었다.
유연대의 꼬리가 잦아드는 북쪽 끝자락, 어은골과 서신교 사이 가파른 곳에는 고찰 진북사(鎭北寺)가 있다. 진북사는 전주부성 주변 사방에 자리잡고 있음으로써 성을 수호했다는 전주의 사고사 가운데 하나이다. 일명 북고사(北固寺)라 일컫기도 하고 속칭 ‘부엉바위절’로 통하기도 한다. 진북사는 또 예전에 ‘범바우절’이라고도 불렸다. 범바우 앞에 지어진 절이었기 때문인데, 범바우는 일제시대 발파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유연대에서 어은골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은 가운데 산등성이 하나를 두고 두 갈래로 에워싸는 산세를 형성한다. 숨은 잉어의 혈이 있어서 어은골(魚隱골)로 불렸다. 전주천의 고기가 숨었다 가는 어은골산은 엉골산, 서살미, 엉골뒷산, 서산 혹은 엉골 뒷산으로도 불리었다. 어은골 능선 끝자락의 서신동 롯데 아파트 근방에는 서신초등학교, 한일고등학교, 이마트, 롯데 백화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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