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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전주․완주 110景 36> 원등나한遠燈羅漢-위봉산성威鳳山城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6.02.08 13:49 수정 2026.02.08 13:49

▮필자: 정복규 언론인
▮그림: 정미정 작가

71. 원등나한(遠燈羅漢)
○…1200년 고찰 원등사(목부암)의 500 나한
↑↑ 원등나한. 그림 정미정 작가

원등나한(遠燈羅漢)은 전북 완주군 소양면 원등사(遠燈寺)의 나한(羅漢)을 가리킨다.
원등사는 소양면 청량산(淸凉山)에 있으며 목부암(木鳧庵)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찰은 산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 말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창건하였다.
원등사는 바로 청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에 있는 송광사나 위봉사에 비해 잘 알려있지 않아 찾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이곳은 약 1,200년의 고찰이며, 산중턱에 진묵대사가 참선을 수행했다는 참선당(토굴)도 있다. 사찰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지가 소실되어 정확한 근거는 남아있지 않다.
원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체징(體澄)은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날려 보낸 뒤 오리가 앉은 곳에 터를 잡아, 창건 당시에는 목부암(木鳧庵)이라고 불렀다. 신라 말 도선(道詵, 827∼898)이 중창하였고,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일옥(一玉)이 절을 크게 확장했다.
일옥이 부안의 월명암(月明庵)에서 수도할 때 이곳을 바라보니 ‘멀리 등불이 보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멀 원(遠), 등불 등(燈)을 써서 원등사로 바꾸었다. 절이 들어선 산 이름도 이때부터 원등산으로도 불렸다. 오늘날에는 청량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쓰인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45년 이후에 복원하였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 공비토벌 때 참선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다시 불에 탔다. 1956년 대웅전을 새로 지어 명맥을 유지했다.
그 뒤 1985년부터 3대 창건주인 수련스님이 석굴법당과 명부전을 재건했다. 1986년 문일·보광이 중창했으며, 1989년부터 수련이 대대적인 불사를 진행하였다. 1989년 당시 석굴법당에 500 나한상을 모시게 됐으며 굴법당도 중수했다. 1991년 인법당을 지었으며, 1992년에는 명부전과 대웅전·참선당·요사채 등을 중건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굴법당·명부전·산신각·참선당·요사채 등이 있다. 굴법당은 자연 암반을 뚫어 만든 것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오백나한이 있다. 오백나한은 일옥이 중창할 때 모신 것이다.
오백나한 중 1명은 일옥의 말을 듣지 않아 매를 맞아 이마에 혹이 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인근 월암리 방죽에도 일옥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일옥이 어느 날 이 방죽을 지나다가 물고기를 잡아 먹었더니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이에 일옥이 먹은 물고기를 토해내자 입에서 나온 물고기는 유유히 헤엄을 치며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진묵은 더운 여름날 땀을 흘리며 목부암에 당도했다. 주지스님은 출타 중이고 절에는 열 네 살 된 행자와 공양주 보살, 그리고 불공을 드리러 온 한 청신녀만 있을 뿐이었다. 청신녀는 40이 다 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여 갖은 방법을 다하다가 이 절 나한이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 날이 길일이라고 하여 처음 찾아 온 것이었다. 목부암은 예로부터 나한도량으로, 그 영험함이 이미 소문이 나 있었던 터다. 그런데 주지 스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고 애를 태우다가 할 수 없이 객승인 진묵에게 기도를 부탁하게 되었다.
“그거야 문제가 없지요. 어서 가서 곡차(술)나 준비해 오시오.” 청신녀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거니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도 굳이 술을 곡차라고 우기고 달라고 하니 어쩔 도리 없이 행자를 데리고 마을로 곡차를 구하러 내려갔다.
진묵은 홀로 어두운 마당을 거닐면서 문득 나한전 앞의 인등(引燈)에 눈길이 갔다. ‘어떻게 저렇게 희미한 불빛이 그 먼 월명암에까지 불빛이 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다가 십육나한의 신통력을 통찰하게 되었다. 바로 십육나한의 신통력으로 월명암의 진묵에게 불빛을 보낸 것이었다.
진묵은 밤새 곡차를 다 들이키고 깊은 잠에 들었다. 첫 새벽에 행자가 도량석하는 목탁소리에 잠이 깼다. 행자는 도량석을 끝내고 법당에 올라가 작은 범종을 울리며 예불소리를 했다.
이로부터 삼일 후 청신녀의 삼일기도가 끝나는 날 아침에 행자는 백부인 주지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미계를 받고 진묵의 첫 상좌가 되었다. 법명은 청안(淸安)이라고 했다. 기도 회향 날 청신녀는 진묵스님에게 말했다.
“스님께서 곡차를 마련해 오면 아들을 점지해 주시겠다고 하고서 기도에 한 번도 참예를 안 해주셨으니 오늘 회향마지는 스님께서 친히 올려주시지요.” 사실 진묵은 연 사흘 동안 곡차로 더불어 지내면서 한 차례도 기도에 참예하지 않았던 것이다.
청신녀는 공양주보살과 함께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여 나한전에 올리고 진묵을 청했다. 진묵은 남은 곡차를 마저 마시고 포단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었다. “공양을 다 올렸거든 어서 가서 부지런히 절을 하시오. 천배일고(千拜一顧)라 했으니, 천배를 드려야 한 번 돌아보실 것이니 절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나도 곧 가리다.”
이윽고 나한전에 나타난 진묵은 석가모니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서 십육나한을 차례로 둘러 본 다음 나한에게 다가가서 느닷없이 귀를 잡아 틀고, 또 다른 나한한테는 뺨을 때리는 것이었다. “야, 인석아! 이 청신녀에게 아들 하나를 점지해주란 말이다.” 이와 같이 열여섯 나한들의 뺨을 차례로 때리고 귀를 잡아당기면서 ‘속히 아들을 점지해 주라’고 호령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청신녀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 달 뒤에 옥동자를 낳으니, 그 집안은 물론이고 온 마을에 경사가 났다. 이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서 진묵의 신통함과 또 곡차 이야기가 꼭 따라붙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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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위봉산성(威鳳山城)
○…조선시대 산성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17호
↑↑ 위봉산성. 그림 정미정 작가

위봉산성(威鳳山城)은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너비 3m, 높이 약 4.5m, 전체 길이 약 16㎞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17호이다. 1407년(태종 7)에 축성하여 1675년(숙종 1)에 중수했다. 위봉산성 주변에는 위봉산과 위봉사 그리고 위봉폭포 등이 있다.
현재 성곽은 석축으로 서·동·북에 3개의 성문이 있는데, 북문은 폭포 서편의 통로상에 있다. 동문 옆에는 장대(將臺)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파괴되고 높이 3m, 너비 3m의 아치형 석문만이 현존한다. 성내에는 위봉사가 남아 있고, 북방 수구(水口) 자리에는 위봉폭포가 있어 전주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전주에서 가까운 곳에 험한 지형을 골라 새로이 성을 쌓아 유사시에 태조 영정을 피난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위봉산성의 주된 목적이었다. 산성 내에 행궁을 세웠는데 「완산지」에 행궁은 영정이안소(影幀移安所)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 위봉산성의 특징을 밝히고 있다.
갑오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했을 때 전라감사 김문현이 전주부성을 방어하는 책임을 저버리고 경기전 영정과 조경묘 위판을 피난시킨다는 핑계로 받들고 와서 승려에게 맡겨놓고 공주로 도망친 일이 있었다.
위봉산성은 처음에는 연산군에 속했으나 1704년(숙종29년) 8월에 김제군으로 속했다. 그 후 9개 고을이 여기에 속하여 각기 군기고(軍器庫)·군향고(軍餉庫)를 두게 하였다. 성안에는 위봉사가 있는 데, ‘행궁을 승도들이 수직한다’라고 한 것처럼 평소의 수비를 위하여 산성 안에 사찰을 짓는 예가 많다. 위봉사도 산성과 행궁을 지키기 위해 동시에 건물을 세운 것이다.
위봉마을 일대는 어린 시절 한번쯤 보았던 추억의 명소다. 이곳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전국 최고 명소로 명명되어 있다. 먼저 송광사에서 위봉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차도 양옆으로 늘어선 성벽이 보인다. 바로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위봉산성이다. 그저 쉽게 지나칠만한 규모로 여느 이름난 성들과 달리 웅대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안에 채워진 역사의 내공은 크다.
이 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년)에 7년의 세월과 7개 군민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다. 전주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의 영정과 전주이씨 시조의 위패를 유사시 보관하기 위하여 전주에서 가까운 험한 지형을 골라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주부성이 동학군에 의해서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이곳에 피난시킨 일이 있다.
이 성은 높이 4∼5m, 길이 16㎞로 3개의 성문과 8개의 암문(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하여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4∼5개의 우물과 9개의 못을 팠고 군대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지금은 일부 성벽과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그 위에 높이 3m의 아치형 성문이 있다.
여기에 아담하고 평안한 여승들의 수행터 위봉사도 있다. 한적한 시골마을을 지나면 산그늘 아래 위봉사가 보인다. 위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604년(백제 무왕 5년) 서암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359년(고려 공민왕 8년) 나옹이 중건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며, 1911년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여러 번의 화재로 많은 당우가 소실되어 보광명전(보물 제608호)·시왕전과 칠성각 등만이 남아 있다.
위봉사에 얽힌 또 다른 설화로는 신라 말기, 최용각이 세 마리 봉황새가 노는 것을 보고 위봉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담한 규모의 위봉사 안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와 소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꽤 오래 되어 보이는 배롱나무와 수령이 500년이나 된다는 소나무가 참 인상적이다.
위봉사를 나와 위봉터널을 지나면 오른쪽에 ‘쏴~’ 하고 폭포수가 떨어진다. 한여름의 소나기가 지난 후였다면 물이 떨어지는 그 소리가 십리까지 퍼졌을 법하다. 60m 넘어 됨직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장관이다. 예전 위봉산성의 동문이 바로 위봉폭포 인근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한편 위봉산성 내 불망비(不忘碑)와 선정비(善政碑) 5기가 서문 내에 자리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고증을 거치지 않은 채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방치되고 있다. 이들 비석군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파손이 심각한 만큼 체계적인 보존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비석들이 한문으로 쓰여져 있는데다가, 모두 깨어진 비석으로 연령을 추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존할 가치가 있는 비석은 복원을 하고, 또 좌대를 설치, 더 이상의 훼손을 막아야 함은 물론 안내문 등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다. 비석과 관련한 내용이 기록된 책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완주군 고종시 마실길 1코스가 이곳을 지나고 있는 데다가, 동학농민혁명 2주갑(120년)을 맞아 남고산성을 찾는 방문객이 잇따르면서 환경 정비가 더욱 시급해 보인다.
맨 왼쪽에 있는 ‘진관 한제희선정비’ 가운데 ‘진관 한제희’ 아래로는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종 18년(1881년)에 세운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라)관찰사 심이택불망비’ 역시 ‘관찰사 심이택’ 이하로는 전혀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고종 16년(1879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전라관찰사 심경택불망비’는 ‘관찰사심경택영세불’까지만 볼 수 있다. 철종 9년(1858년)에 건립됐으며, 이들 비석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 이들 비석이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곳에 자리하게 됐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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