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완산전투(完山戰鬪)
○…1984년 동학 농민-관군 완산칠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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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_ 정미정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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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전투는 1984년 동학농민 전쟁 당시 동학군과 관군이 완산칠봉에서 벌인 싸움을 말한다. 전주의 명산인 완산칠봉 장군봉에는 팔각정(八角亭)이 있다. 이곳 종각 맞은 편 비석의 기단에는 ‘보국안민(保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이 새겨져 있다.
홍계훈의 경군과 농민군은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홍계훈은 4월 25일에야 영광을 출발하여 27일 금구에 도착하였다. 농민군에게 처형당한 선전관 이주호, 종사관 이효응·배은환 등의 시신을 수습하고,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근처에 진출한 것을 알면서도 밤이 늦었다는 이유로 금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하루 차이를 두고 농민군의 뒤를 쫓아온 경군은 28일 정오 무렵, 용머리고개를 넘어 전주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완산(完山)에 진을 쳤다. 완산은 최고봉이 해발 186m 밖에 안 되지만 전주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홍계훈의 관군 1,500여명은 건지산, 기린봉, 오목대, 황학대 등에 배치하였다. 길게 포위망을 형성하며 전주성을 에워싼 것이다. 그리고 본영은 용머리고개 남쪽 산 중턱에 설치하는 등 전투 준비를 마쳤다.
군진을 형성함과 동시에 경군은 전주성을 향해 포를 쏘아댔고, 이에 맞서 농민군 수백 명이 서문과 남문으로 나와 완산칠봉의 경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의 전술은 지형에 불리했다. 완산전투의 첫 싸움에서 농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29일에는 농민군이 북문을 열고 나와 황학대를 공격하였으나 경군의 화포공격에 1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물러났다. 5월 1일 농민군이 남문을 열고 경군을 공격했으나 이때에도 경군의 화포공격으로 3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농민군은 관군이 쏘아대는 탄환을 피하기 위해 등에다 황색종이에 붉은 글자로 주문을 쓴 부적을 붙였다. 입으로는 탄환을 제거하는 주문‘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을 높이 외치면서 빗발치는 탄환 속으로 뛰어 들었다.
경군은 전주성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이에 농민군은 서문을 열고 나와 용머리고개의 경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화포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물러났다. 전주성을 배경으로 한 농민군과 경군의 최대의 격전은 5월 3일에 벌어졌다.
농민군은 이날 아침 10시경부터 서문과 북문으로부터 돌진하여 사마교(司馬橋, 현 다가교 자리)와 부근의 하류를 건너 유연대(油然坮, 현 기전여고 북서쪽 최고봉)를 공격하였다. 농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유연대 부군의 경군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농민군은 이를 추적하여 다가산을 점령한 후 다시 남진하여 용머리고개를 가로질러 경군의 본영이 있는 곳까지 육박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여기에서 경군 본영으로부터 대포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 용장 김순명, 아기장수 이복용을 비롯하여 500여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고 성안으로 물러났다. 이때 전봉준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으며, 전투는 오후 6시경에야 끝이 났다.
4월 28일에서 5월 3일까지 벌어진 완산전투에서 농민군은 전력상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황토재전투, 황룡촌전투, 전주성 점령 등으로 치솟았던 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고, 궁지에 몰린 가운데 내부의 동요마저 이는 상황이었다. 3일 이후로 더 이상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 전투를 끝으로 관군과 화약을 맺어 5월 8일 농민군이 자진해산할 때까지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76-2 전주한옥마을 내에는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이 있다.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숭고한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 5월 31일 세워진 기념관으로 상설전시장과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 개관한 전시실로 혁명과정을 볼 수 있는 당시 사진전시 및 동학혁명서적 등을 판매한다. 소장물로는 동학혁명 과정의 사진,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龍潭遺詞)와 최시형(崔時亨)의 동상 등 100여 종에 이른다.
한편,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봉기(제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봉기(제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8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들 중에는 전봉준, 김개남 외에도 손화중, 이방언 등 농민군 남접의 최고 지도자들 상당수가 흥선대원군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의해 살해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농민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운동 진압 후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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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완산칠봉(完山七峰)
○…전주의 옛 지명 完山의 7개의 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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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_ 정미정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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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칠봉(完山七峰)은 완산승경 가운데 하나이다.
완산칠봉은 또 전주를 상징한다. 완산칠봉의 완산(完山)은 전주의 옛 지명이다. 그리고 칠봉은 7개의 봉우리가 연달아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사실 완산칠봉에는 7개 봉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홑산이 아닌 겹산으로 이뤄져 있는데, 주봉인 장군봉(163m)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뻗어있는 두 갈래의 산줄기를 내칠봉, 서쪽 방향의 꽃밭정이로 흐르는 산줄기를 외칠봉이라고 해 모두 13개 봉우리가 있다.
산의 전체적인 모양은 기러기 형국의 산형을 하고 있다. 완산칠봉 가운데 가장 높은 완산수봉의 높이는 186m이며 내칠봉, 외칠봉, 좌우칠봉으로 이루어졌다.
완산칠봉(完山七峰)은 전주시의 중앙부로 흐르는 전주천을 따라 이어진 산줄기이다. 해발 163m의 중봉을 비롯, 주변에 건지봉(108m), 투구봉(100m), 용두봉(132m)등 7개의 봉우리가 어깨를 나란히 이은 완산칠봉 일대는 전주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완산칠봉 가운데 중봉 일대는 동학농민혁명 때인 1894년 5월 31일 전주부성을 점령하여 입성한 전봉준과 농민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관군을 공격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같은 해 6월 4일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다시 이곳에 진을 치고 농민군과 격전을 벌였던 전적지이다. 정상에 있는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중턱에는 농민군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동학군 전주입성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완산칠봉 공원에는 전나무·삼나무·측백나무 등으로 숲이 우거져 도심 속에서도 진한 피톤치드 향을 맡게 해준다.
주봉인 장군봉에 오르는 길은 여러 곳이 있다. 1봉부터 7봉까지 차례로 오르려면 평화동에 위치한 갤러리아웨딩홀과 교회 사이에 있는 등산로를 이용하면 된다.
1봉(도화봉)부터 2봉(매화봉), 3봉(금사봉)을 지나 조금만 오르면 만날 수 있는 4봉(모란봉)과 5봉(선인봉), 7봉 중에 그나마 오르기가 가장 힘든 6봉(검무봉)을 지나면 마지막 7봉(장군봉)에 도착하게 된다.
장군봉 정상에는 팔각정이 있다. 이곳에서는 전주 시가지와 건지산, 모악산 등을 모두 볼 수가 있다. 완산칠봉에 오르다 보면 봉우리마다 가볍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들이 설치 돼 있다. 완산칠봉 아래에 위치한 전주 완산체육공원에는 배드민턴 코트장이 있다.
완산칠봉 생태습지는 5개의 연못이 층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수련, 물억새, 왕버들, 조팝나무 등과 개구리, 두꺼비, 도롱뇽, 맹꽁이 그리고 원앙, 백로, 두루미 등 천연기념물들이 서식할 정도로 생태계가 완벽하게 복원돼 있다.
특히 참개구리, 옴개구리, 청개구리, 무당개구리, 아무르산개구리, 두꺼비, 맹꽁이, 도룡뇽의 양서류가 서식한다. 실제로 연못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올챙이들이 보인다. 도심에서 사라져가는 습지를 복원함으로써 생태계를 살리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학습의 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옥녀봉을 지나 효자동 쪽으로 내려가면 정혜사가 나온다. 1898년에 세워진 정혜사는 비구니 승려들이 있는 사찰이다. 너무나 고요하고 깔끔한 분위기다.
전주시 완산동 시립도서관 옆 투구봉에는 아름다운 꽃동산이 있다. 철쭉, 벚나무, 백일홍, 단풍나무 등 다양한 꽃나무가 있다. 도심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정자와 파고라도 설치하고 판석과 잔디식재 등으로 아름다운 산책길도 조성했다.
한편, 전주시 당국에서 펴낸 관광안내 등 각종 홍보물에 명기한 완산칠봉의 이름이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예부터 성문 안과 밖에서 보는 시각에 따라 내(內) 칠봉과 외(外) 칠봉이 엄연히 구별돼 있었으며 진봉(眞峰)은 안에서 본 내칠봉이 맞다는 주장이다. 옛 성문 안 기준으로 동-서로 뻗은 내(內) 7봉, 그리고 장승로에서 본 7개 연봉은 외(外) 7봉이 맞다는 지적이다.
전주 지명의 유래가 된 진짜 완산칠봉은 옛날 4대문 안, 구도심에서 바라볼 때 전주천을 따라 동-서로 이어진 7개의 연봉이라는 것이다.
등산코스로 보면 완산초등학교 인근 매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안내판 왼쪽에 자리한 매화(梅花)봉으로 부터 시작해 동학입성 기념비가 서 있는 탄금(彈琴)봉을 거친 후 팔각정이 서있는 장군봉-장군대좌봉-에 이르러 정상을 이른다. 이곳에서부터 내리막으로 돌아서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주는 옥녀봉~금송아지 전설이 어린 큰바위를 지나 무학(舞鶴)봉~옛날 백운정이 자리했던 백운(白雲)봉을 거친 후 현 용머리 고개의 용두(龍頭)봉에서 마감한다.
현재 완산칠봉으로 혼동되고 있는 봉우리에 대해서는 성 밖, 즉 지금의 장승로 쪽에서 바라 본 7개의 봉우리로 옛날부터 완산외봉으로 불렸다고 한다.
완산칠봉의 주봉인 장군봉을 정점으로 검무(劍舞)봉~선인(仙人)봉~모란(牧丹)봉~금사(錦絲)봉~매화(梅花)봉~도화(桃花)봉 등 역시 봉마다 이름을 갖추며 평화광장 등산로 초입으로 내려 뻗어 있다.
봉우리의 호칭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완산칠봉은 각각의 봉우리마다 선인들의 정취와 풍류가 듬뿍 담겨져 있는 멋스러운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고유 이름을 외면하고 단순히 ‘1봉, 2봉…’ 식의 이름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숫자를 차례로 나열한 현재의 호칭은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이다.
외칠봉을 진봉으로 소개한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장군봉 주변의 잡목을 제거해 팔각정에서 보는 도심 조망권도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완산칠봉에는 금송아지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송아지가 비스듬하게 무릎을 꿇고 쉬는 자세처럼 보인다. 신령님의 노여움을 받아 바위가 되어버린 애처로운 사연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