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삶과 꿈/ 김장은 하셨습니까?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4.12.09 11:32 수정 2024.12.09 11:32

■ 장택상 가족신문.kr 발행인

올해도 저물어갑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월동준비는 어떻게 잘하고 계십니까. 시골에서 살아보면 이웃들 대부분은 자급자족하기 위해서 밭농사를 약간씩 짓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급자족이래야 간장 된장 고추장과 가을철 김장을 위해 여러 가지 밭작물을 가꾼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옛 어른들께서 왜 그렇게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을 중요시했고, 가을철 김장을 위하여 온 정성을 다하셨는지 짐작이 될 듯합니다. 여느 농사들이 다 그렇지만, 고추 농사도 쉽지 않습니다. 병도 많고, 고추를 따서 햇볕에 제대로 말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농가에서는 기계로 고추를 세척하고, 햇볕에 얼마만큼 말린 후 다시 건조기에 넣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봄부터 가꾸는 각종 푸성귀는 평상시에도 유용한 반찬거리지만 한편으로는 가을철 김장에 필요한 양념거리를 미리미리 준비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쌀이 남아돌아서 정부에서는 논에 콩을 심으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김제-부안 쪽의 들녘을 지나다가 보면 콩을 심은 논이 꽤 많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장류(醬類)가 무척 발달했습니다. 우리 고장 김제를 비롯한 들이 넓은 지역 농가의 장독은 수도 많았고 특히 간장독은 어마어마하게 컸습니다. 기계화되기 이전의 우리 농가에서는 많은 수의 일손이 필요했고 그만큼 많은 장류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장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메주콩(대두)부터 마련해야 합니다. 늦가을이면 가마솥에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었고 겨우내 메주를 띄웠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면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서 간장과 된장을 만들고, 따로 메주를 가루 내어서 고추장을 만들면, 간장-된장-고추장이 됩니다. 우리 음식은 ‘간장-된장-고추장’이면 거의 만사형통 아닙니까. 그래서 그랬던지, 어른들께서 장독을 보살피는 정성은 거의 종교적이었습니다.

옛 어른들은 일 년 내내 가을철 김장 생각을 하셨던 듯합니다. 노릇노릇한 황석어는 모심는 철에 나왔습니다. 할머님 말씀으로 김장용 젓갈은 황석어젓이 최고였습니다. 그 시절 햇감자 넣고 졸인 황석어 찌개의 추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나중에 듣고 봤더니, 김장용 젓갈이나 양념들은 각각 집마다 선호하는 것이 약간씩 달랐습니다. 그 집의 안주인이 나름대로 어떤 비법이라고 여기는 ‘레시피’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 시절 갖가지로 갖춰서 넣었던 김장 배추김치 속 양념은 색색으로 호화로웠습니다. 김장 때 썼던 짭짤한 젓국은 따끈하게 덥혀서 밥반찬으로도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고향에서 동치미를 안 담그는 집이 없었습니다. 동짓달 밤 동네에 마실 가서 출출해질 때면, 의례 동치미와 삶은 배추 뿌리 등이 나왔습니다. 행여 누가 먼저 일어서면, ‘골목길이 끄들끄들 얼면 가라’고 붙잡던 시절 얘기입니다.

해가 저물면 지나간 일들이 두서없이 생각납니다. 지난 한 해뿐 아니라 더 오랜 옛날 일들도 돌이켜집니다. 얼마 전에 극장에서 1994년에 나왔다는 ‘가을의 전설’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저도 수십 년 전에 봤었던 영화인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고, 처음 보는 영화처럼 재미가 있었습니다. 저의 지나간 삶 속에 무슨 일이 있었나 돌이켜 봐도, 희로애락(喜怒哀樂), 기쁘고 슬펐던 일이 영화 장면처럼 떠오릅니다. 그러다 어느 기억에 스스로 깜짝 놀라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 시 가운데 ‘추천사(鞦韆詞)’라는 시가 있습니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라는 시의 첫 구절처럼, 제 삶 가운데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사람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반짝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고마운 분 가운데는,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고맙다는 말씀을 못 드린 분도 계십니다. 올해가 다 저물기 전에 찾아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언 생활 수준이 모두 높아져서 그런지 옷값도 음식값도 제과점 빵값도 다 비쌉니다. 옷이야 맘에 안 들면 안 사고, 안 입으면 되지만, 음식은 가격만큼 품질이 좋지 못하면 먹고 나서도 몹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집 음식의 맛은 김치를 어떻게 담갔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음식점에 어쩌다가 우연히 들어 온 새로운 손님이라도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럽게 느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음식점이든 새로운 손님이 찾아 들어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일반 가정집에서 쉽게 맛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음식을 음식점에서 제공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럴 능력도 없이 음식점을 열고 매상에만 관심을 둔다면 무슨 소리를 듣겠습니까. 능력도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꿰차고 거들먹거리는 것과 똑같지 않겠습니까. 김치도 맛있게 담가서 칭찬받는 정도가 돼야 음식값 하는 것 아닙니까.

김치맛이 싱거워졌습니다. 땅에 묻는 대신 김치냉장고가 생겨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김치가 거의 시어지지 않고, 사람들 입맛도 서구화되어 가는 탓도 있는 듯합니다. 아무쪼록 집에서 무엇보다 김치를 잘 담글 일입니다. 잘 담가서 잘 익은 무김치는 잘 담가서 잘 익은 배추김치보다 더 맛있습니다. 겨울철 동치미는 어떻습니까. 동치미는 국물보다 무를 훨씬 많이 넣어야 톡 쏘는 맛이 납니다. 동치미에 함께 넣은 청양고추가 익으면 그 또한 별미 아닙니까. 김치는 약간 싱겁게 담가서, 이제 짠 반찬으로 그치지 않고, 밥과 함께 먹는 주식이라고 할 정도로 많이 섭취했으면 좋겠습니다. ‘된장-간장-고추장’도 시장에서 메주를 사더라도, 집에서 담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장 김치도 맛있지만, 시시때때로, 배추 한두 포기씩, 새 김치를 담아서 먹는 것 또한 별미입니다. 밖에서 외식 몇 번 했다고 치고, 김치에 넉넉하게 투자합시다.<가족신문.kr 발행인>


저작권자 시사전북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