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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時流風說/ 난 전라도 사람이여!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4.04.14 09:41 수정 2024.04.14 09:42

-필자 서용현 전 전북대 로스쿨 교수
-I left my heart in 샌프란 전주

내 원 고향은 충청도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천안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중고교와 대학을 다닌 후 외교부에 들어가 주로 서울에서 살았다. 거주기간은 서울이 제일 길었다. 그러나 서울을 고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나는 외교관으로서 이 나라 저 나라에 가서 살았다. 워싱턴, 스위스(제네바) 등등…. 그러나 이들 나라들도 ‘고향’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너무 똑똑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른 나라는 필리핀이었다. 사람들이 착하고 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외교부에서 최고의 임지라는 Big 4 중의 하나인 주제네바 대표부에서 임기도 채우지 않고 최하의 임지 중 하나인 마닐라로 자원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서용현이 레만(Leman)호에 투신자살했다.”라고 비유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만의 것이다. 남들이 좋다는 곳이 내가 좋은 곳은 아니다.

나의 두 번째 ‘제2의 고향’은 베네수엘라였다. 여기도 3류 임지다. 하지만 사람들이 착하고 신명이 좋다. 최근 여기 사람들이 독재자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착할수록 사깃꾼에 넘어가기 쉬운가 보다.

여긴 기후도 기가 막히다. 내가 ‘천국성 기후’라고 부른다. 나는 베네수엘라를 떠날 때, 작별편지에서 “내가 베네수엘라를 떠나는 것은 실낙원(失樂園, 영국 시인 밀턴의 서사시)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다. 복락원(復樂園)의 꿈이 있기에!”라고 썼다.

내 친구였던 당시 베네수엘라 국방장관은 “베네수엘라를 베네수엘라인들보다 더 사랑하는 호세(내 현지 이름)에게”라는 초대형 감사장을 증정했다.그리고 나는 파리로 갔다. 나의 ‘제3의 고향’이다. 

그러나 그토록 가고 싶었던 파리에서 열 달밖에 살지 못 했다. UN사무총장 선거에 참전하라는 반기문 사부의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억울했지만 존명(尊命)했다. 그랬더니 더 좋은 기회가 왔다. 전북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좋아했다. 학생들하고 노는 것을 엄청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외무고시 출신은 개도 한다는 대사도 포기했다.

나는 서울법대에서 법 공부를 전혀 안 했다. 사법시험 문전에도 안 가보았다. 그래서 나는 ‘무법자’라고 불리었고, 뭘 가르칠지 막연했다. 활로는 있었다. 나는 외교관 경험을 바탕으로 ‘소통과 협상’을 가르쳤다. 변호사 시험과목은 아니지만, 변호사에게 꼭 필요한 과목이었다. 학생들이 많이 몰렸다.  

나는 교수 발령을 받자마자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전주 교외(색장동)에 900평의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정남향에 배산임수(背山臨水)인 꿈같은 집이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15년 가까이 전주 집에서 살았다. 최근 잠간 서울 아들 집에서 살았지만 갑갑해서 4월 중순에 다시 전주로 이사 간다. 귀거래사 II다.

전라도 출신이지만 주로 서울에서 산 사람들보다 호남에 오래 살았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 되었다. 나는 서울 강남 등지에 큰 아파트를 사서 거기에 전 재산을 묶어두고 있는 친구들을 비웃는다. 

“전주 얼마나 좋은가? 풍광 좋고, 물가 싸고, 음식 맛있고, 종합병원이 없다고? 서울 대형병원에서 기다리다가 지쳐서 죽는 것보다 전주 병원이 어디가 어때서!”

나는 외교부 근무시절, 인근 복집에서 옆자리 젊은이가 ‘호남 푸대접’에 관해 침을 튀기며 얘기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다.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패배주의를 가지고 어떻게 성공할까?’하고. 

오늘처럼 조직문화가 중요한 때에 호남 푸대접을 해서 조직 자체가 잘될 리가 없다. 외교부에서도 실력과 자신감이 있는 호남인은 높이 올라갔다.

나는 부하직원을 쓸 때 그가 호남 출신인지에 관해 관심도 없었다. ‘호남 푸대접’은 상당부분 전라도 사람들이 자초한 것이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인간관계를 협소하게 하고, 선거 때 인물에 관계없이 동향사람들을 밀고, 그러면 더 다수인 타지사람들은 전라도 사람들을 경원시하고….   

전라도는 반역의 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은 전라도가 가장 풍족한 곳이었기 때문에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반역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증인이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고 했다. 호남의 지원이 없었으면 왜군에 대한 반격이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 시기에 의병투쟁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은 전·남북 지역이었다. 
전라도는 반역의 땅이 아니다. 의(義)의 땅이다.

왜 미국 텍사스, 중국 사천성보다 작은 땅에서 지역감정 타령하고 있는가? 나는 전주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 다만 바닷가에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으니 부산, 해남, 여수, 통영, 삼척 등에서도 살아보고 싶다. 여기저기서 친구도 사귀고 싶다.

작고한 신중현 씨의 노래 ‘아름다운 강산’에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 하얀 물결 넘치는 저 바다와 함께 있네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 훗날에 너와 나 살고 지고”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렇게 살고 싶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여어어~!“라고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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