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 박인숙 前 전북중소기업청장= 전북특별자치도 임실 출신으로 전주기전여고를 졸업하고 전북대, 전북대 환경대학원에서 공학석사를, 전북대 대학원 토목공학과에서 수질환경을 전공한 공학박사다. 전북중기청 기술과장, 광주․전남지방중기청 기술과장, 대전․충남지방중소기업청장, 전북중소기업청장을 역임했다. 고분자제품기술사로서 저서 ‘화학계측이야기’(1993, 편역)가 있다.
<필자의 辯> 1908년 안국선 선생께서 쓰셨던 ‘금수회의록’과는 다르게 기후변화와 인간들의 탐욕에 따른 무분별한 개발, 그리고 남획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동물들의 시각에서 글을 연재한다.<편집자>
2025년은 내가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3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현장을 발로 뛰며 별의별 일을 겪어 온 나를 회사에서는 대(大)기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난 연말, 취재 기사 원고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던 나를 데스크에서 호출했다.
“내년 초에 전주에서 아주 특이한 회의가 열린다고 하니 대기자께서 휴가 삼이 그곳에 가셔서 취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은 정중하게 했지만 이제 나이도 들었고 하니 일선에서 물러나 가십거리나 쓰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곧바로 간단하게 짐을 꾸려 KTX를 타고 전주로 내려갔다.
멍하니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옥형으로 지어진 전주역사를 나오니 거리마다 행사를 알리는 화려한 가로기가 걸려있었다. 제2회 세계 금수 회의가 이곳에서 열리게 됨을 홍보하는 가로기였다.
금수(禽獸)란 날짐승(禽)과 길짐승(獸)를 함께 부르는 말로, 1908년 첫 금수 회의에서는 지나치게 인간사회의 모순과 비리만을 희화화 하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다.
거기에 연이은 세계 대전과 자연재해 등으로 동물들 스스로 생존에 급급하다 보니 속개되지 못하다가 2025년이 되어서야 두 번째 회의가 열리게 된 것이다.
나는 숙소에 짐을 풀고 준비위원회 관계자들을 만나 취재를 시작하였다.
역사적인 이번 회의 장소가 전주로 결정이 된 배경에는 최근 국제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참석 동물들의 안전 문제가 크게 고려되었다고 한다. 관계기관에서는 이 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 민관합동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준비해왔다고 설명하였다.
원활한 동시통역을 위해 앵무새통역사를 초빙하였고 별도로 통역시스템도 개발하였다.
회의 개최 한참 전부터 가로를 정비하여서 도시 전체가 산뜻했다.
회의 하루 전날에 수첩을 든 담당 직원들과 신분증을 목에 건 자원봉사자들이 호텔에 와서 준비상황 전반에 대한 최종 점검을 하였다. 특별히 방송시설과 동물 언어 통역시스템은 여러 차례 점검하였다.
회의장 전면에는 제2회 세계 금수 회의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리고, 호텔 입구 국기 게양대에는 태극기와 함께 참석 동물들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깃발이 그들의 이름 알파벳순으로 걸렸다.
호텔 주변에는 신문과 방송에서 이번 회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기웃거렸다.
회의 당일이 되었다.
호텔 입구에는 레드카펫이 깔리고 캐노피에는 청홍색 휘장을 둘러놓았다.
관계자들은 회의장 테이블 위에 놓은 명패를 정돈하고 마이크와 이어폰 등을 점검하고 나서 필기도구와 음료수까지 세팅 완료하였다. 회의장 입구 안내 부스에 각종 브로슈어를 쌓아 놓았고 자원봉사자도 배치되었다. 호텔 주변에는 경찰들이 폴리스라인을 치고 혹시 모를 혼란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행사 준비상태 점검하던 총괄팀장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완벽해!”
드디어 참석 동물들이 입장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날짐승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몇몇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들어왔다. 까만 연미복 차림의 황제펭귄은 한껏 멋을 부리며 우아한 자세로 입장을 하고, 일부는 점잔을 빼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걸어 들어오고, 또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레드카펫을 밟았다. 맨 마지막으로 코끼리와 고릴라가 느릿느릿 걸어들어오면서 입장 행렬은 끝이 났다.
회의장에는 방송 카메라와 기자들로 가득하여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모두 자리에 앉아 통역용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나자 사회를 맡은 진돗개가 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사회자석에 섰다.
“참석해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제2회 세계 금수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본 회의 의장이신 한반도 호랑이님이 주재하시기로 예정되었습니다만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오시다가 남한과 북한 간의 휴전선에서 며칠째 발이 묶이시는 바람에 아직 도착하지 못하셨다는 전언입니다. 따라서 우선 부의장이신 반달가슴곰님께서 인사 말씀과 함께 본 회의를 주재하시겠습니다.”
까만 털을 잘 손질하여 하얀 V자 가슴 무늬가 선명한 부의장 반달가슴곰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부의장 반달가슴곰 인사드립니다. 100여 년 만에 개최되는 뜻깊은 회의 참석을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와주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머리 숙여 감사 인사드립니다. 사회자가 말씀드린 대로 의장님께서 도착하실 때까지만 제가 회의를 주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회의는 미리 공지해 드린 바와 같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기후변화와 인간들의 탐욕에 의한 무분별한 개발 그리로 남획으로 우리 동물들의 생존권이 위협을 받고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우리가 처한 상황을 상세히 정리하여 유엔 지속개발위원회 안건으로 상정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지금까지 여러분들께서 보셨거나 직접 겪으신 내용을 진솔하게 발표해 주셔서 우리 동물들의 삶이 지속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되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한편 이 자리에 꼭 참석하시고자 하였으나 회의장 성격상 함께 하시지 못하신 참고래님께서는 영상으로 발표 자료를 보내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오늘 자리를 함께해 주신 모든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잠시 자리를 정돈하는 동안 서로 인사를 나누신 다음에 아시아 코끼리님의 발표를 시작으로 회의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 회의 개회식뿐 아니라 폐회까지 전 과정을 동행 취재하기로 마음먹었다.<2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