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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전북

群山 출신 창작 한국무용가 김시원, 새 지평 열 寵兒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1.12.10 16:04 수정 2021.12.14 10:53

춤사위 12년… 안무가•모델 전천후 활약으로 큰 기대

-어머니와 춤은 ‘둥지’이고 아버지는 ‘롤모델’ 신념
-15세때 輪禍 시련딛고 무용入門 한국무용에 눈떠
15세(중3) 때 무용의 길에 들어선 뒤 11년 동안 외길을 걸으며, 한국무용계 촉망받는 무용가로 떠오른 전북 군산 출신 김시원(27,남) 씨에 대한 한국무용계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무용에 입문 직전 대형 교통사고로 대수술(머리)을 하고 난 이후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한 무용을 통해 일시적인 시련을 딛고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해 오로지 춤 외길을 걸으면서 ‘한국무용의 총아(寵兒)’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특히, 신장 179cm에 몸무게 69kg을 유지하기 위해 소식(小食)하고 있는 그에게 몸 관리와 부단한 연습, 그리고 무대에서 쏟아 붓는 열정과 실력을 인정하고 있는 한국무용계에서는 “무한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이 주류여서 그의 춤사위 절정이 어느 지경에 다다를지 관심이 크기에 더욱 그렇다.

자신을 한국무용으로 이끌어준 어머니와 무용에 대해 자신을 품어주는 ‘둥지’이며, 아버지는 ‘롤모델’이라는 그는 무용가로서, 안무가로서 일관되게 담아내고 싶은 것은 ‘휴머니즘’이라고 단언한다. 즉 ‘우리 함께 살아가야하는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추구하는 춤과 안무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따뜻한 인간애’와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인간의 표상을 무대에 연출하고 춤사위에 담아내는 작업이라는 의미다.
그는 창작 한국무용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되는 성균관대학교 임학선 교수 계보를 잇고 있으면서 ‘임학선댄스위’ 공연작품 거의 모두에 출연하고, 안무를 익혀나가고 있다.

또한 COREO ENT 소속 전속모델로 활동하면서 전천후 엔터테이너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착착 쌓아가고 있어, 주변과 동료 선후배들은 “앞으로 한국무용을 아우르는 종합 엔터테이너로 성장해 우뚝 서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시원 한국무용가를 지난 11월 20일 오전 전주 시사전북/시사전북닷컴 사무실에서 만나 한국무용가의 길을 걷게 된 계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인터뷰로 엮었다.

-무용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저는 시작이 보통의 무용하는 친구들하고는 조금 달랐어요. 대부분 본인이 춤을 추고 싶어서 추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어머님이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를 보시고 저에게 발레를 추천하셨거든요. 처음에 추천을 받았을 때 저는 질색했어요. “남자가 무슨 발레냐, 난 쫄쫄이(타이즈) 못 입는다.” 이러면서요.
그때 당시 중학교 3학년 나이였던 저는 ‘발레는 여자만 하는 것이고, 남자가 하기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험성적으로 어머니와 내기를 했고, 성적이 나오지 않은 저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군산 김정숙 무용학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타이즈를 입기 싫었던 저는 타이즈보단 한복이 낫겠다 싶어 한국무용을 선택했어요. 사실 저는 한두 달하는 척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한국무용에 갑자기 확 매료되어버렸지요. 그 이후부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무용에 빠져들었고, 지금껏 무용가의 길을 걷게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무한성장할 한국무용계 샛별로 평가받고 있는데, 어떤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
►먼저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영광입니다. 춤적으로, 춤외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22세부터 28세까지 13번의 콩쿠르에 맨몸으로 계속해서 부닥쳤던 여러 번의 시도들과 춤을 사랑하는 순수함,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보여주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져서 그렇게 평가해주신 것 같습니다.

-무용가로서 외길을 걷기 위한 결심을 굳힌 데는 어머니의 힘이 컸다고 알고 있다. 어머니란, 무용가로서 어떤 의미인가?
►둥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께 너무 감사했던 순간은 너무 많아서 모든 순간을 나열할 수는 없지만, 기억에 남는 대화를 나누자면, 제가 너무 많은 공연과 콩쿠르 낙방, 그리고 몸이 너무 고된데 그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죽을 듯이 하는데, 왜 나는 4500원짜리 밥을 걱정하며 먹어야 할까?’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차있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때 어머니께서 전화로 “시원아, 너무 힘들면 다 그만두고 군산으로 내려와도 된다. 너가 그렇게 힘들 때 기대어 쉬라고 있는 것이 부모이고, 힘들 때 돌아올 수 있는 것이 고향이란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사실 그 당시에 제게, “시원아,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지.”라고 말씀을 하셨으면 제가 오히려 무용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게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그래, 내가 돌아갈 곳이 있는데 할 수 있는 데까지 더 해보자, 더 해보자!’라는 각오로 계속 도전했고, 더 저렴한 밥을 찾던 시기를 보내고, 꿈을 계속 쫒아가는 삶을 살아오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토닥거려준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무용단에 입성한 곳이 국립무용단 인턴단원이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을 텐데, 당시를 회상한다면.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한국무용을 하는 제 또래의 친구들 중에 국립무용단에 대한 꿈을 키워보지 않은 친구들은 없을 겁니다. 정말 인정받은 무용수만 모여 있는 곳이니까요. 제가 한국무용을 선택하고 가장 처음 봤던 작품이 국립무용단에 있는 조용진 무용수, 이재화 무용수의 동아콩쿠르 작품이었거든요. 또 춤을 깊게 공부하게 되면서 제가 영향을 받았던 선생님들도 국립무용단 출신도 너무 많았고요.
그래서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그 시간동안 후회가 들지 않게 정말 즐겁고 열정을 불태우며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극장인 국립극장이라는 무대에 서보고 내가 존경하던 수많은 무용수들과 합을 맞추고 땀을 흘렸던 시간들은 24살의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가치 있는 선택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관객의 힘-무대의 힘이 무대공연의 원동력

-현재 은사인 임학선 교수가 운영하고 있는 ‘임학선댄스위’ 단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출연작품을 소개해주고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2013년 이후 공연된 임학선댄스위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한 것 같습니다. 가장 대표작으로는 <위대한 스승, 공자> <영웅, 이순신>을 꼽을 겁니다. 가장 최근의 임학선댄스위 작품은 지난 8월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이라는 작품입니다.
그 작품 내용은 지금 코로나로 인해 강제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 우리의 삶, ‘혼돈의 시기에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제 역할은 현실에 부닥쳐 방황하는 인간의 역할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공연을 끌어가는 역할을 맡아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된 것 같습니다.

-한국무용가로서 입지를 공고히 다져가고 있다. 처녀 출연한 작품은 무엇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처음 출연했던 작품은 대학교 1학년 때 출연한 학교 선배인 박완주 안무가의 라는 작품입니다. 대학교에 막 들어왔을 때라 굉장히 서툴고 열정만 가득했던 저를 잘 이끌어준 완주 누나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사실 많은 작품이 머리를 스쳐지나갑니다. 워낙 많은 작품들, 많은 안무가들과 작업을 했고, 너무 좋은 기억이 많거든요!
그렇지만, 하나의 작품을 꼽으라면 2020년 아르코 파트너로서 공연했던 정보경 안무가의 <다가오는 것들>을 고르겠습니다. 강렬할 수밖에 없는 게 저희가 4달 동안 일주일 서너 번 4시간씩 모여서 만든 공연이었고, 출연진들도 정말 너무 좋은 무용수들이었거든요. 제가 사랑하는 정보경 선생님의 안무이기도 했고…. 정말 모두가 피땀을 흘리며 작품을 준비했는데, 공연 3일 전에 취소됐어요.
당시 코로나19 확진자가 천명이 넘어가면서 국공립극장들이 셧다운을 해버렸거든요. 그렇게 저희는 처음 마주한 상황 끝에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르코극장 관계자들과 안무자, 무용수들의 의견이 모아졌고, 취소된 다음 주에 셧다운 기준이 완화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기 위해 좌석 거리두기와 공연 횟수를 줄여 1회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끝내고 커튼콜과 갈채를 받으며 줄줄줄~ 흐르던 눈물이 잊히지 않네요. 공연 무대는 소중한 곳이라고 늘 느껴왔지만 그날 다시 한 번 관객의 힘과 무대의 힘을 느낀 날이라 제겐 강한 무대로 기억에 남습니다.

-안무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표적인 안무작을 소개한다면.
►2020년 두리춤터 1F FOYER에서 공연했던 <이란격석>을 자랑하고 싶어요. ‘이란격석’이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뜻입니다.
이 작품을 안무에 대한 생각의 출발은 ‘계란은 바위를 부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세상의 모든 계란이 저 하나의 바위에 부딪친다면 어떨까? 깨어진 계란의 속은 흐르고 흘러 물이 될 것이고, 멈추지 않은 계란의 부딪힘은 파도가 되어 바위를 삼킬 것이다. 그 파도는 비록 바위를 부술 수 없을지라도 바위를 흘러가게 할 수 있다’에서 준비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작품에 참여했던 박성권(음악), 서이진(무용수)과의 리서치 내용을 기반으로 바뀐 내용은 ‘내가 끝내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지 못할지라도, 그 바위 위에 새겨진 나의 흔적들이 아름답게 남을 수 있기를, 그 흔적들이 웃으면서 돌아설 수 있기를’이라는 내용으로 바뀌었고, 그 내용을 밑받침으로 안무를 했지요.(골똘히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

-무용가로서의 어려움은 무엇일까?
►제가 느끼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무용예술은 무형의 가치를 쫒아가는 예술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어느 정도에 와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렵죠. 대중의 반응을 지표로 삼기에는 관객 숫자가 적고, 무용계 평가를 지표로 삼기에는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가늠자 없이 본인의 예술이 흔들리지 않고, 무형의 가치를 쫒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제가 세운 기준을 쫒아가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쓰고 있고요.
두 번째는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국공립단체에 들어가서 활동하지 않는 이상, 단지 공연자체로만 생활비 이상의 소득을 만드는 무용수는 극히 드물거든요. 또 한 번에 여러 가지의 공연 연습을 같이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부상위험도 있고요. 그렇기에 대부분의 무용수들은 레슨과 병행하고 있고요.
레슨하기 어려운 상황에는 파트타임 잡(Job)을 통해 생활비를 만드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것들을 묵묵히 찾아가는 모습에서 박수를 받기도 하지만, 화려한 무대 위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많은 무용수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안무가로서의 보람과 어려움은?
►개인적으로, 저는 안무를 하고 그 작품을 발표하며 제가 치유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의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지 못해서라는 내용의 글을 본 기억이 있는데요. 저는 안무를 통해 제가 만든 저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니까요.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 있게 봐주는 관객분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제 이야기에 공감하며 감정을 표현해주시는 것에 치유 받고, 그런 것들이 저를 보람차게 하는 것 같아요.
어려움이라면, 아마도 ‘많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안무의 어려움인거 같아요. 사실 무용이 대중예술이 아니기도 하고, 무용 공연을 보았을 때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점이겠지요?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공연이 많은 것은 아니니까요!(단호하게 말하며 웃음)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안무를 보여주고 싶어도, 관심도나 인지도 차이가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는 힘들다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부분은 앞으로 제가 열심히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죠.

#이따금씩 모델 활동 땐 새로운 즐거움 느껴

-요청이 있다면 모델로도 이따금 활동하고 있는데, 모델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제가 무용을 하면서 알게 된 저는, ‘저를 표현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든 생각이 ‘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구나, 오직 춤만 좋아한다’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냥 나를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게 춤이든, 음악이든, 연기든, 사진이든, 글이든 뭐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생각이 들고 난 뒤에는 모델 요청이 들어와 한두 번씩 활동할 때면 새로운 즐거움을 느낍니다. 실제로 즐겁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금은 전속사인 ‘COREO ENT’에서 광고모델도 함께 병행해 활동하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5, 6일 이틀간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무대에 올린 전라북도도립국악원 창극단 정기공연 ‘달의 전쟁-말의 무사 이성계’ 조안무를 맡아 고향 무대에 선을 보였는데, 조안무로서의 소감은?
►제게는 굉장히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16살 때 소리문화의전당으로 공연을 보러 갔는데, 12년 뒤 제가 그 자리에서 조안무를 하고, 공연에 참여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쁘고 감격스런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전라북도도립국악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 저를 조안무로 추천해주신 채향순 안무감독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국내외 롤모델은? 그 까닭은?
►조금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입니다. 저는 롤모델이 항상 바뀌어 왔는데요. 강수진 발레리나가 롤모델이었던 적도 있고, 그리스의 드미트리스 파파이나우 안무가, 영국의 아크람칸 안무가가 롤모델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학교 선배가 롤모델이 었던 순간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 롤모델은 아버지로 줄곧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이 되고 아버지와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누고, 아버지를 알게 될 때마다 ‘저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아버지의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도망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상황들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티고, 마주하고 이겨내어 계속 삶을 이어나갔다는 것에서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어렸을 때 머리를 다쳤을 때도 아버지의 판단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지도 몰라요. 정말 생명의 은인인거죠 저의 아버지는…(생각이 깊어보였다). 아버지와 대화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내가 이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멋진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살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이후, 제 롤모델은 아버지였습니다. 롤모델은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남성 한국무용가로서 힘든 점은 무엇이고, 보람은 무엇인지?
►힘든 점이라기보다 걱정되는 것은 ‘내가 가장이 되었을 때 안정적인 수입이 없으면 가정이 불안정할 텐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라는 것입니다.
보람이라면- 남성무용가의 보람이라기보다는 무용가의 보람에 가까운 듯한데- 제가 표현하는 것을 보고 울고, 웃어주는 사람들의 피드백이랄까요. 그 피드백들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전업 무용가의 길을 걷고 있는데, 앞으로의 꿈은?
►제 생각으로는 앞으로 정말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의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 꿈은 20년, 30년 뒤에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공간이 현실화 된다면 극장이라는 공간의 한정된 인원을 넘어서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에게 퍼포먼스를 보이고 싶은 것이 제 꿈입니다.

-한국무용가로서 목표점은 무엇이고, 안무가로서 지향하고 있는 목표는?
►관객에게 기대를 주는 무용수이고 싶은 것이 목표입니다. 축구선수 메시가 공을 잡으면 무엇인가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처럼, 김연아가 등장하면 어떤 예술을 보여줄 것인가 기대를 하는 것처럼, 제가 캐스팅 명단에 있다면 관객들을 흥분시키고, 기대감을 갖게 하며, 몸짓언어를 표현하는 한국무용가로서 남고 싶습니다.
안무가로서는 휴머니즘을 말하는 안무가이고 싶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보다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안무가가 되고 싶습니다. 작품을 보면 어딘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들이 있거든요. 저는 그러한 작품을 연작으로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 안무가가 되길 지향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제 작품을 보고난 뒤에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길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를 주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주고 간다든지, 집 근처 이웃을 마주치면 간단한 고개인사나 눈인사라도 하는 그런 작은 변화들이요!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런 작품을 만드는 안무가가 되길 희망합니다.

#한국무용 긴 호흡요…大衆흡입 어려울까 걱정

-SNS를 포함해 영상매체가 문화예술 시대적인 흐름을 잡아당기는 시대다. 무용가로서 이에 대한 시각은?
►처음에는 이렇게 짧고 자극적인 영상물로 가는 시대가 안타까웠습니다. 무용공연은 특히 한국무용 공연과 같은 경우는 호흡이 긴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계속 시대의 흐름이 짧고 자극적인 영상들이 주목을 받는 시대가 되니, 무용으로 대중들에게 부각되는 것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직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등장해 사회를 집어삼키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무용이 어떠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선점해나가느냐에 따라 무용을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무용이 어떤 이미지를 가질까 기대하기도 합니다.

-남성 한국무용가가 갖춰야할 기본적인 조건이 있을 것인데, 어떤 것들을 갖춰야 하는지?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춤을 위해 나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당연히 바꿀 수 있다’는 해답을 갖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몸짓을 넘어서기 위한 춤을 추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꿔야 하는 순간들이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거든요!
‘춤은 마음으로 추는 것’이라는 말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기본적으로 춤을 위해 나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면, 더 좋은 춤을,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 모든 것들이 서울에 집중되고 있다. 예술인 또한 마찬가지인데, 고향 전북에서 활동하고픈 생각은 있는지?
►당연히 있습니다. 고향은 제가 돌아오고 싶은 곳이고, 돌아와야 하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성장과 발전이 필요한 저에게는 서울서 활동을 하는 것이 맞다’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전 분야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제가 고향 전북에 돌아와 지역 문화예술계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고, 후배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 것 같습니다.

-고교, 대학, 대학원 등 무용가로 정통 코스를 밟아왔는데, 한국무용을 하고파하는 후배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권하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도제식 교육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배워보고, 많은 것들을 느껴봐야 보다 더 자신에게 맞는 춤사위와 맞는 사상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무를 하기 위해서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창작 능력도 탁월해야 하는데, 본인의 창작능력과 스토리 구성 정도는 어떻다고 생각하는지?
►제 스스로 아직은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스스로 평가를 해보자면,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안무를 진행할 때 보다 강점을 지닌 안무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작품들에는 제가 항상 출연을 했고, 제가 출연했기에 더 진솔하게 느낀 부분이 있습니다만, 보다 정확한 안무능력 평가가 진행되려면 제가 출연하지 않는 안무를 경험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명 콩쿠르에 다수 참가해 기량을 인정받았으나 ‘1등’은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콩쿠르에 여러 번 나가본 경험으로 생각하면, 사실 예술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용과 같이 정확한 기준이 없는 경우에는 더 평가하기가 어렵기도 하구요.
그러나 언제나 무대에 서고 콩쿠르에 도전할 때 ‘명작은 취향을 타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도전했습니다. 도전할 때마다 취향에 갈려 상반된 평가를 얻기도 했으나, 제가 명작이라고 불릴 만큼의 춤과 안무를 무대 위에서 보여준다면 취향과 상관없이 모두의 마음을 감화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2021년 마지막 콩쿠르를 은상으로 마무리하면서 ‘아직 나로서는 모두의 취향을 넘어설 수는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쉽기도 했지만요. 하지만 앞으로 또 나아가야할 방향을 찾았기에 절망하거나 그 자리에서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명작은 취향을 타지 않는다’라는 말을 담금질하며 명작을 만들기 위해 작품을 만들고, 움직임을 찾고, 춤을 추고, 자신만의 표현을 찾아가려합니다. 이제는 콩쿠르에 한정짓지 않고 작품, 더 나아가서는 예술을 향해서요.

-중학교 때 교통사고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데, 청소년기 어려움이 한국무용가로서 성장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는지? 되었다면 어떤 형식으로 발현되고 있는지?
►중학 3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던 도중 사고를 당해 머리를 개복하는 큰 수술을 하고 한 달 정도 입원해있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꿈이라거나 목표가 구체적이지 않았는데, 제가 한 번 큰 위기를 겪어서인지 부모님이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적극 응원해주고 지원해주겠다는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그래서 무용을 추천하시기도 하고, 자연스레 무용을 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배경을 통해 저는 그 이후 삶에 대해 약간 ‘보너스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깨어나지 못할 수 있는 수준의 사고이후에 건강하게 사는 것은 정말 감사한 삶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더 깊게 고민하게 되었고, 계속 저의 행복을 좆아 여기까지 오게된 것 같습니다. 그 행복을 좆는 길에 무용가라는 직업이 있게 된 것 같아요.

#안무가 의도에 맞는 춤사위 표현•전달 중요

-한국무용가 김시원, 그 계보를 정리한다면?
►저의 무용 시작은 군산 김정숙 선생님입니다. 덕원예술고를 다니며 양서정•최태선•조성윤 선생님께 춤을 배웠고, 성균관대학교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현재의 스승님이신 임학선 교수님께 춤을 배웠습니다. 전통춤은 햔량무 문화재보유자이신 조흥동 선생님께 한량무를 배우고 있습니다.

-본인이 출연한 무대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제가 무용수로 출연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표현을 안무가의 의도에 맞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기량도 물론 중요하지만 일정기량을 넘어서면, 안무자와의 소통을 통해서 안무자가 무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무용수에게 필수적이자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무용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요즘은 춤을 넘어서 ‘움직임’에 집중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컨템포러리 댄스(동시대 춤)이라는 단어를 정립하고 사용한지도 꽤 되었구요. 저를 비롯한 많은 한국무용을 전공한 친구들의 작업방식과 움직임을 보면 컨템포러리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발전시켜야 한국무용이라는 범주가 더 커질 테니까요. 하지만 외적인 확장성과 함께 내적인 깊이감을 더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움직임과 컨템포러리 댄스에 대한 열망이 강해질수록 그와 함께 전통춤과 우리가 말하는 춤의 정신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정립해나가는 시간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률적인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본인만의 방식으로요.
또한 그렇게 내적인 깊이가 있어야 앞으로 무용과 같은 몸짓언어가 콘텐츠가 되었을 때 더 강한 무기가 되어 있겠다고 전망해봅니다.

-무용가로서의 철학은?
►임학선 교수님 철학이기도 한데요. 저 역시 그 사상에 감화되어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춤은 수신(修身)’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수양하는 것처럼 춤 역시 계속 수양해야만 우리가 쫒고자하는 궁극적 진리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궁극적 진리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요.

-무용가 김시원으로서, 안무가로서 꼭 담아내고 싶은 것이 있다면?
►휴머니즘입니다. 점점 더 사람과 사람사이의 끈이 단절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 끈을 놓지 말자, 우리는 함께 살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습니다.

-삶을 관통하는 신념, 신조는 무엇이고, 이유는?
►‘영혼이 보다 더 자유로워지자’입니다. 계속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틀에 갇히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술을 하고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틀에 갇히면 더 이상 창의적인 예술들을 선보이기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계속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삶이 제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시원 한국무용가 가족으로는 투자법인 새만금국제개발•새만금국제공인중개사무소 대표 김배균 님을 아버지, 공인중개사 어머니 구지윤 님 사이에 김도은 씨를 누나로 둔 막내둥이다.

□김시원 한국무용가는?
-전북 군산 출생
-제20회 성균관대학교무용경연대회 고등부 저학년 창작 은상
-제21회 성균관대학교무용경연대회 고등부 고학년 창작 특상
-제31회 중앙대학교무용경연대회 고등부 저학년 창작 금상
-제34회 전국 대학무용경연대회 한국무용창작 은상
-제17회 서울 국제 무용콩쿠르 민족무용창작 2nd
-제58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한국무용창작 은상
-2018 두리춤터 우수작가전 <안> 안무
-2020 포이어 무용 영상 융복합시리즈 <이란격석> 안무
<광고 모델 이력>
-COREO ENT 소속 모델
-2021 DORCO GLOBAL TV CF MAIN MODEL
-2021 LG전자 GLOBAL CF SUB MODEL
-2021 김서룡 패션필름 모델 및 무용수 출연
-2021 한복문화주간 진주패션쇼 리허설 어시스트 및 출연
-2019 ADIDASORIGINALXMUSINSA YOUNG1 광고 안무 및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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