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전라감영(全羅監營)
○…전라도․제주도 통할한 중심 관청
전라감영지(全羅監營址)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4-1 옛 전라북도청사 자리에 있던 조선시대의 감영이다. 감영은 해당 도내의 행정과 군사 등 모든 업무를 총괄하던 곳을 말하는 것으로 도의 중심지가 된다. 조선말에 작성된 『전주지도』, 『전주부지도』을 통해 전체적인 감영의 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감영에는 중심 건물로 업무를 보던 선화당과 관풍각, 포정루 등 많은 시설이 있었다. 전라감영은 조선 초에 설치된 이후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통할하였던 군사․행정의 중심지였다. 동학농민 혁명 당시 전주화약을 맺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전라북도청사가 효자동 서부신시가지로 이전됨에 따라서 전라감영지를 원형대로 복원 중에 있다.
이 사업은 전라감영과 풍패지관, 풍남문, 경기전 등 전주의 대표적 문화유산과 연계해 관광과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구도심의 활성화를 견인토록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전주시는 2006년 9월부터 2007년 2월까지 전라감영지 시굴 및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2009년 2월부터는 전라감영 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학술용역 및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해 완전복원과 부분복원, 상징복원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왔다.
전라감영 터에는 전라북도청사가 들어서서 지난 2005년까지 자리잡았다. 이후 도청이 효자동으로 옮겨 가면서 전라감영에 대한 복원 논의도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감영 복원은 단순 건물 복원이 아니다. 민족정신과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도 복원을 놓고 말들이 많았었다. 어떤 규모로 할 것인지, 한옥마을과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지, 예산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결국 1990년대 중반부터 20여년 만에 오랜 논의 끝에 복원이 결정됐다. 이어 전라감영 고유제와 더불어 옛 도청사 건물 철거에 이르렀다.
전라감영은 조선 태조 4년(1395년)~고종 22년(1895년)까지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해온 중심 관청이었다. 이후 갑오개혁(1895년)으로 8도제가 폐지되고 일제 강점기에는 상업시설이 난립하는 등 영욕의 세월 속에 지금의 모습으로 남겨졌다. 그 감영지는 2000년 9월 전북도 기념물(제107호)로 지정됐다.
감영(監營)이란 조선시대 8도에 배치된 감사(관찰사)가 일을 보던 곳이다. 당시에 감사는 문무 모두에 실권을 휘둘렀기 때문에 감사가 있는 영문이라는 뜻으로 감영(監營)이라고 불렀다. 감사가 직무를 보던 관아, 일명 순영이다.
조선시대 각 감영의 소재지를 보면 경기도의 경우, 초기에는 분명치 않고 광해군 때인 1618년에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 일대)에 두었다. 충청도는 공주에 두었고, 전라도는 전주에, 경상도는 대구, 황해도는 해주, 강원도는 원주, 평안도는 평양, 함경도는 함흥에 두었다.
감영에서 필요한 경비는 관용 둔전에서 충당했고 감영별로는 관둔전 20결, 늠전 80결, 공수전 15결과 노비 450명(전라․함경 600) 및 공장(工匠)이 소속되어 있었다(경기 1, 충청 19, 경상 39, 전라 19, 강원 22, 황해 19, 영안 6, 평안 11). 감영은 감사가 있던 곳으로 당시 지방에서는 최고위직 관료가 일하던 관아였기 때문에 지방민들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전라감영 일대 변화상이 기록되고 있다. 전주문화재단은 2013년부터 추진 중인 ‘전통문화도시 조사·기록화사업’ 일환으로 전라감영 일대의 변화상을 조사하고 기록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사업은 전통문화중심지구내 주민·단체, 문화·상업시설 등의 변천 과정을 조사를 통해 기록화함으로써 전주시 문화정책 및 실수요자 중심의 콘텐츠 개발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사업이다.
재단은 전주시의 ‘전라감영 복원계획’에 따라 구 전북도청사 철거가 진행 중이며 인근 웨딩거리와 차이나거리 등을 중심으로 상권의 변화가 눈에 띄게 일어나고 있는 전라감영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참여 연구진 구성을 마친 재단은 2016년 6월부터 주민 및 문화, 상업시설의 현장 전수조사를 본격 추진했다. 재단은 지난 3년간 전통문화도시 조사기록화 사업을 통해 한옥마을 문화, 상업시설 550여 곳의 전수조사와 9개 분야 150여 건의 자료를 축적했다.
원도심 재생에 따른 급격한 생태계 변화를 성실하게 기록하고 자료화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변화 속도에 함몰돼 놓치거나 잊고 있는 것들에 대한 ‘오늘의 기록’이야 말로 후세에 물려줄 귀중한 ‘미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옥마을에 이어 급격한 변화가 예상되는 전라감영 권역으로 처음으로 실시되는 전수조사인 만큼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현재 전라감영 복원계획에 따라 구도청사 철거가 진행 중이다. 인근 웨딩거리와 차이나거리 등을 중심으로 상권의 변화가 눈에 띄게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다.
이에 전주문화재단은 변화 속도가 더 빨라지기 전에 주거공간과 문화, 상업시설 등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참여 연구진 구성을 마쳤다. 문헌 등을 통한 예비조사와 정확한 조사권역을 설정하기 위해 전문가 자문회의를 거친 후 주민 및 문화, 상업시설의 현장 전수조사를 6월부터 본격 추진한다.
전라감영 복원 문제는 조선시대 8대도시로서 명성을 되찾는 일이다. 복원사업이 완료되면 도민들에게 호남 제일성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옥마을이나 영화의 거리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돼 구도심 활성화에도 일조할 것이다.
82.전주부성(全州府城)
○…‘전주부성 축성록’ 바탕 옛 길 재생
18세기 전주부성을 중심으로 한 당시 전주지도는 전주를 잘 그려주고 있다. 2011년 7월 전주부성의 역사를 담은 번역서 ‘전주부성 축성록(全州府城 築城錄)’이 발간돼 관심을 모았다. 이 책은 전주와 전주부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축성계초(築城啓草)’로 알려졌던 이 책은 1734년(영조 10) 전라감사 조현명이 주도한 전주부성 개축의 전모를 기록해놓은 필사본 자료다. 그동안 강원도 춘천 풍양조씨 문중에 소장돼 있던 이 책은 당초 ‘한예집수(漢隸潗數)’라는 해서․예서체를 모아 놓은 것으로 소개됐다.
그 뒤 2003년 유재춘 강원대 교수가 풍양조씨가의 문서를 재조사하면서 전주부성 축성에 관한 문헌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발간된 책은 당시 유 교수가 ‘축성계초’(築城啓草)라는 제목으로 학계에 발표한 논문을 이동희 관장과 이희권 교수가 국역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는 1733년부터 이듬해까지 전주성 축성과 관련해 중앙에 올린 문서, 각 군현에 내린 문서, 축성 절차와 물자 등이 총괄적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일제에 의해 사라진 전주성을 역사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한 영조 때 개축되기 이전의 전주 옛 성에 대해서도 기록해 놓았다. 옛 성의 규모와 형태, 나아가 전주성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은 우리나라 축성에 관한 기록이 임진왜란 후 ‘화성성역의궤’와 ‘동래부축성등록’, 경상도 금오산성 축성에 관한 ‘축성금오시일기’ 등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조선 후기 축성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축성을 위한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서부터 당시의 공역이 어떤 형태로 진행됐으며, 인력 동원은 어떻게 했고 그 처우는 어떠했는지, 나아가 백성들의 형편을 어떻게 배려하면서 공역을 해나갔는지 등의 구체적인 실상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장인, 일꾼 등의 품삯이라든지 급료 등이 사항별로 상세히 기록돼 있어 일꾼들의 하루 급여 및 기능별 차이 수당 등에 대해 살펴볼 수도 있다. 죄인에게 일을 시키고 죄를 면해 주고, 기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한 기록들도 있어 조선의 18세기 사회경제상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전주시는 2016년 8억여 원을 들여 옛 전주부성이 있던 중앙동과 풍남동을 대상으로 ‘역사 도심 기본계획 및 지구단위계획 수립 용역’을 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전주시는 천년 전주의 전통 이미지와 낙후된 구도심 활성화를 위해 조선시대 전주부성(全州府城) 길의 재생에도 나섰다. 충경로와 팔달로를 중심으로 5.4㎞의 전주부성터 길과 주변 가로가 해당된다. 풍남문 주변 정리와 북문·동문·서문 등 재현 등도 해당된다. 앞으로 전주 한옥마을 인근의 옛 전주부성 일대가 역사·문화 보존지구로 관리될 전망이다.
전주부성은 성곽도시였다. 전주부성의 남문과 풍남문은 오늘날 전주를 상징한다.
또한 전주부성 안에는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조선시대 전주부성은 일본이 양곡 수송을 위해 1911년 전군가도를 개설하면서 성곽 동쪽 부분이 남문(지금의 풍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면서 부성의 자취가 사라졌다.
한편 조선시대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이 쌓았다는 고토성이 전주부의 북쪽 오리에 있다고 나온다. 전북도청에서 북쪽으로 2km 지점은 지금의 전주고등학교 뒷편, 전주시 중노송동 일대다. 이 일대는 오래 전부터 견훤의 궁궐터라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곳이다.
고토성 한가운데 위치한 물왕멀 역시 견훤과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문에서도 견훤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왕멀 일대의 민가를 조사한 결과 왕성의 건축 초석인 각이진 석재와 대형 초석 1만 여 개가 현존하고 있다. 견훤이 쌓았다는 고토성의 흔적은 사신 체계 안에서 확인됐다.
견훤은 전주에서 완벽한 왕도를 꿈꿨다. 892년 견훤은 무진주에서 나라를 일으켰다. 그 후 900년 견훤은 삼국통일의 야망을 품고 전주로 천도, 백제를 부활시켰다. 그는 완벽한 방어체계를 자연적으로 겸비한 승암산을 왕궁지로 택했다. 그리고 산 정상에 그의 꿈을 이룰 터전인 ‘전주성’을 세웠다.
전주성 주 건물지의 주춧돌은 모두 6열이다. 1열과 2열의 간격이 4.2m인데 반해 3, 4, 5열의 간격은 1m이다. 사람이 왕래하기엔 어딘가 불편한 간격의 배치다. 주 건물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산 능선을 따라 10여개의 건물지가 더 발굴됐다.
견훤의 왕성은 상성, 중성, 내성에 외성을 더한 체계로 돼 있었다. 자연능선에 따라 이어진 독수리 날개 형태다. 항상 전쟁 중이었던 후백제는 전쟁에 대비해 산성 궁궐이 필요했다.
승암산은 그에 적합한 능선을 가진 천혜의 요새였다. 그리고 왕궁 주변 방어에 불리한 부분은 돌로 석성을 쌓았다. 북문은 중성과 내성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상성 바로 아래는 관청과 여러 행정기관이 자리한 내성이 위치한다.
그 아래로 왕족과 귀족이 거주하던 중성이 있다. 동편은 기린봉 산자락의 자연 능선을 성벽으로 이용했고 부족한 부분은 토성을 쌓았다. 성벽 둘레만도 18km이다. 당시 도읍지로 정한 전주는 견훤에게 꿈과 야망을 실현시켜줄 약속의 땅과도 같았다. 그 땅위에 철저한 계획도시 후백제 전주성을 세웠던 것이다.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세운지 천년이 훨씬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