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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전주․완주 110景 40/ 전군도로全群道路-전동성당殿洞聖堂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6.06.07 11:10 수정 2026.06.07 11:10

▰ 필자: 정복규 언론인
▰ 그림: 정미정 작가

79. 전군도로(全群道路)
○…26번 국도 전주~군산 100리 4차선 도로
↑↑ 전군도로
그림 정미정 작가

전군도로(全群道路)는 전주시와 군산시 사이 46.4㎞ 왕복 4차선으로 개설된 자동차 도로를 말한다. 전주~군산을 잇는 100릿길로 전주시와 군산시의 첫 글자만을 따서 전군도로라고 했다. 중간에 익산시와 김제시를 지나며 번영로라고도 불린다. 26번 국도인 전군도로는 ‘수탈의 길’로 통한다.

이 도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 포장 신작로이다. 신작로는 새로 닦은 길로써 넓고 반듯한 길을 의미한다. 일본이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08년 전주에서 군산항 인근까지 건설했다. 너른 평야의 쌀은 전주∼삼례∼익산∼김제∼만경∼군산을 거쳐 그렇게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
 
전군도로는 전주, 동산촌, 대장촌, 목천포, 대야, 군산을 통과한다. 이들 지역에는 일본인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들이 산재돼 있었다. 1975년에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했다. ‘번영로’라 명명할 당시, 일본 관동지구 전북인회의 지원을 받아 6,374그루의 벚나무를 심어 벚꽃길을 조성하였다. 2002년 5월 전주-군산 자동차 전용도로 일명 산업화 도로가 개통된 이후 전군 도로는 지방도로 전락했다.
 
일제는 헌병들을 앞세워 도로공사에 착수했다. 일제는 도로에 편입된 농토를 헐값으로 빼앗았다. 농민들을 윽박질러 땅을 빼앗은 것이다.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무차별 폭력이 가해졌다. 공사에 들어가자 농민들을 강제노역으로 내몰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농사는 뒷전으로 하고 공사장에 불려나갔다.
 
도로가 완공된 뒤 농민들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제야 비로소 왜 신작로가 만들어졌는지 이해한 것이다. 쌀을 일본으로 내가는 것이었다.
신작로를 제일 많이 오가는 것은 소와 말이 끄는 달구지였다. 볏섬을 가득가득 싣고 군산으로 줄을 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서너 달 동안은 달구지 행렬이 이삼십 리씩 이어지기가 예사였다. 그 볏섬들은 모두 군산에서 모여 일본으로 실려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자신들의 국화인 사쿠라, 즉 벚나무를 도로 연변에 심었다.

도로 인근 곳곳에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은 등록문화재인 삼례 양곡 창고와 만경강 폐철도 등이 있다. 양곡창고와 폐철도는 일제가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전 보관하거나 운반한 철로다. 특히 삼례 양곡 창고는 지금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내부 또한 당시 쌀의 신선도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시설이 잘 보존돼 있다.

1970년대까지 관내 양곡창고로 활용됐으나 이후 삼례역이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옮겨가고 도심 공동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양곡창고로서 기능을 상실했다. 완주군은 이 창고를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예술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문화체험장으로 고쳤다. 또 1920년 건설 당시 한강 철교 다음으로 긴 교량 철교로 알려진 만경강 철교는 기능이 상실되자 한때 철거가 논의됐다. 그러나 ‘아픈 역사’를 잊지 않도록 보존으로 결정됐다.

개화기 이전 전주를 기점으로 한 대표적인 교통로는 전주~강경 노선이었다. 전주에 모인 물산은 강경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따라 내려가 인천으로 수송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9년 군산이 개항되면서는 강경을 거치지 않고 군산항에서 인천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전주~군산 길은 너무 좁아 물자를 수송할 수 없었다.
 
전주~군산 간 도로의 확장 개설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특히 전군가로에는 이미 호남평야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인 농장이 있었다. 물자와 양곡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이 도로의 확충이 매우 필요했다. 결국 1907년 5월 조선정부는 전주에 치도국 출장소를 내고 전주~군산 도로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이것은 전북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이 공사는 1908년 10월에 완료되었다. 노폭 7m, 총길이 46.6km에 이르는 길이 뚫린 것이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전주~강경 노선은 급격히 쇠퇴하여 강경은 크게 위축됐다. 반면 군산은 상업 중심지로 더욱 발전하였다. 일본인들은 편리한 도로망을 타고 재빠르게 진안, 임실 등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하여 농지를 점유하고 쌀을 사들여갔다. 전군도로를 수탈의 길로 활용한 셈이다.
 
1914년 개설되는 호남선과 1936년 개설되는 호남선의 철도 역시 수탈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전주에 처음 철도가 들어선 것은 1914년 10월의 일이다. 그러나 이때의 철도는 노폭이 3척인 협괴 즉 경편철도였다. 대전~목포 261km, 이리~군산 24.7km의 호남선 철도가 개설된 것은 이보다 앞선 1914년 1월이었다.
 
그런데 전주는 호남선 철도 구간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일제가 1936년 이리와 여수를 잇는 198km의 전라선을 개통하여 전주에 보통의 철도가 놓이게 되었다. 호남선 철도 개설에 대한 논의는 1910년 시작된다. 그러면서 노선을 어디로 하느냐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군산의 일본인 농장인 오오꾸라(大倉)와 전주의 이와사끼(岩崎) 간의 군산 경유 노선과 전주 경유 노선 간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전주의 유지들이 전주 경유 노선을 극렬히 반대하자 통감부에서는 전주도 아니고 군산도 아닌 이리 노선을 확장하였다. 대신 전주와 이리는 규모가 작은 경편철도(經便鐵道)가 놓이게 됐다. 그리고 전주의 유지들은 전주에 제대로 된 노선을 유치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최근 전북도는 전주·군산·익산·김제 등 4개 시와 함께 ‘번영로 벚꽃길 되살리기’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벚나무를 새로 심고 마라톤이나 사이클 등 국제스포츠대회 유치도 검토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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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전동성당(殿洞聖堂)
○…1971년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터
↑↑ 전동성당
그림 정미정 작가

전동성당(殿洞聖堂)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있는 천주교 성당이다. 1891년 프랑스인 신부 보두네가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푸아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 벽돌을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시대에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는 곳으로 천주교회사에서 많은 순교자를 낸 곳으로 꼽힌다. 전동성당은 자연 순교지의 하나가 되어 있는 전동의 풍남문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이 성당은 백 년의 전통을 간직한 순교 일번지로서 동양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전동성당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이 참수형을 당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터이다. 그 10년 후 신유박해 때 유항검 및 많은 지도자급 인물들이 순교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된 전교의 발상지이다.

윤지충은 고산 윤선도의 6대손으로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났다.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정조 때 좌상인 채제공의 신망을 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였다. 권상연은 안동이 고향으로 문학과 윤리를 공부하다가 고종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를 배워 충실히 실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전라도 진산에 살고 있던 윤지충은, 1791년(신해년) 5월에 모친상을 당하자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한 후,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였다. 이는 숭유정책으로 유교가 국교이다시피 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양반가를 유지하는 골격을 이루는 사회에서 분주폐제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우리 역사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이 분주폐제(焚主廢祭,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로 말미암아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라감사가 윤지충에게 유교 제사를 폐지한 이유를 묻자 “제사의 음식은 육신의 양식으로 영혼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이다. 그리고 신주는 목수가 만든 목편(木片, 나무조각)에 불과하니 죽은 영혼이 물질적인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없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사상 맨 처음 있었던 공식적인 호교론(護敎論)이었다.

그런 윤지충과 권상연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다가 1791년 12월 8일 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휘광이의 칼날 아래 참수되어 9일 동안 전주 풍남문에 내걸렸다. 정조 임금은 그들이 순교한 지 9일만에야 시체를 거두어 가도록 허락했다.

그 기적의 땅에 순교한 지 100년 만에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선혈이 어린 성곽의 돌로 주춧돌을 세워 23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1889년 봄, 전동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보두네(프랑스 선교사) 신부가 임명되고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전주는 당시 개항지가 아니었고 전주감영이 위치하고 있어 보두네 신부는 전주에 곧바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주 근교인 대성리(완주군 소양면)에 머물면서 전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되었다.

전동성당은 1908년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 공사를 마쳤다. 성당 건립의 공사 청부는 중국인이 맡았다.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벽돌을 직접 구워서 썼고, 주춧돌은 1909년 7월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남문밖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

이로써 1791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을,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를 지켜보았던 그 성곽의 돌들이 하느님 성전 건립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이다.

전동성당 완공은 보두네 신부가 목숨을 걸고 온 힘을 다 바쳐 노력한 결과였다. 그 후 모든 시설을 완비하고 축성식을 가진 것은 1931년으로, 완공하기까지 23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7구의 순교자 유해를 작은 항아리에 각각 담고 이름을 써서 달았다. 그런 다음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재목을 구하기 위해 사두었던 성당 동쪽 기린봉(306m) 자락에 있는 ‘치명자산’(전주시 대성동 산 11번지)에 이들 일곱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했다. 그때가 1914년 4월 19일이었다.
 
이어 1949년에는 전동 성당 신자들이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건립하고 교구장 김현배 신부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가졌으며, 1984년에는 이 지역이 지방 기념물 69호로 지정되었다. 전주교구에서는 이를 계기로 치명자산 개발 계획을 세운 뒤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95년 기념 성당을 완공하였다.

1937년 한국 교회 최초의 자치교구로 전주교구가 설정되고, 전동성당은 주교좌 성당(1937~1957)이 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인민군이 이 성당을 점령하여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및 차량 정비소와 보급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 

1980년 중반 이후에는 전라북도 지역 내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도민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88년 10월 10일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그 뒤 본당 설립 100주년(1989년)을 맞아 기념사업과 함께 성전 보수를 시작하여 1992년에 보수 공사를 마쳤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성당 주위에 전통문화 센터 및 한옥체험관이 들어서는 등 전통적인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성당도 담을 헐어내고 대신 멋진 나무로 조경을 하여 어디에서나 성당 전경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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