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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Contribution/ 다가산이 전주시에 묻습니다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6.06.07 10:41 수정 2026.06.10 09:40

-땅을 사고파는 행정 너머 ‘전주의 마음’을 지키는 지혜
▰ 필자: 정 민 (재)전주천양정 이사

↑↑ 정 민 (재)전주천양정 이사
전주천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다가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디선가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과녁을 향해 시위를 떠난 화살이 팽팽한 바람을 가르는 이 울림은 바로 300년 넘게 이곳 다가산을 지켜온 천양정(穿楊亭)의 소리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화살 소리가 아닙니다. 전주가 가장 힘들던 때 이 땅을 지켜온 선조들의 숨결이자 전주의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입니다.
최근 ‘도시공원 일몰제’라는 파도 속에서 다가산을 두고 전주시와 천양정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보면서 법조문이나 예산서의 숫자 대신 이 땅이 품고 있는 사람과 문화, 그리고 협치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어 보고 싶어졌습니다.

◇ 백보천양百步穿楊, 기원과 전주대사습놀이 유래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전주부의 뜻있는 유지들이 모여 무예를 닦고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활터를 세운 것이 천양정의 시작입니다. 천양(穿楊)이라는 이름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백 걸음 밖에서 활을 쏘아 버들잎을 꿰뚫었다는 백보천양(百步穿楊)의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활터는 단순히 활만 내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시대 전주에는 호남 사회의 군사, 행정, 문화를 아우르는 대사습(大射習)이라는 특별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대사습은 군사들의 활쏘기 훈련과 무예 경연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영조 시대에 이르러 대사습청(大射習廳)이 설치되었고 대사습이 열리는 날이면 소리꾼들과 예인들이 모여들어 한바탕 축제를 벌였습니다.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는 무인들의 기상과 가슴 깊은 곳의 한(恨)을 뿜어내는 예인들의 소리가 다가산 자락에서 한데 어우러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국악 등용문이 된 전주 대사습놀이의 유래입니다.
천양정이 있던 다가산은 활을 쏘던 무사들의 훈련장이자, 명창들이 전주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목을 풀던 우리 소리의 고향이었습니다.

◇ 동학東學의 협치 유산과 눈물로 되찾은 성역

문화의 요람이었던 다가산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격랑을 받아낸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1894년 초여름의 어느 날에 외세의 개입을 막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며 일어선 동학 농민군 수천 명이 전주천 사마교(지금의 다가교)를 건너 목숨을 걸고 뛰어올랐던 곳이 바로 이 다가산입니다. 완산칠봉의 관군에 맞서 다가산을 점령했던 농민군들의 거친 숨소리가 다가산의 바위와 나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역사에 완산전투로 기록된 이 싸움 후 민과 관은 공멸 대신 평화를 선택해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 화약의 결실로 전라도 53개 고을에 설치된 것이 바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중 자치 행정 기구인 집강소(執綱所)였습니다.
집강소는 기존 고을 수령의 행정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민간의 대표들이 참여해 신분제를 타파하고 민생을 돌봤던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민관 협치(Governance)의 시초였습니다. 관의 권위와 민의 자율성이 지혜롭게 공존했던 위대한 정치 실험이 바로 이곳 전주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14년에는 일제가 ‘전주시민의 정신을 말살하겠다’며 천양정 소유의 땅 1만여 평을 강제로 빼앗아 다가산에 신사(神社)를 지었습니다.
천양정의 선조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다가산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등 끊임없는 법적·정치적 투쟁을 이어 나갔고, 1948년 일제의 잔재를 이겨내고 마침내 이 땅을 온전히 환수했습니다.
다가산은 단순한 공원 녹지가 아닙니다. 다가산은 300년 소리의 뿌리이자, 집강소의 협치 정신이 깃든 곳이며, 일제의 침탈을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역사의 성역입니다.

◇ 지방채 6000억원, 전주시의 무거운 어깨

이제 세월이 흘러 전주시는 이 소중한 공원을 지키기 위해 사유지를 강제로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전주시가 마주한 밤잠 못 이루는 고민과 고충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시의 재정 상황은 그리 넉넉하지 않습니다. 빚을 내어 땅을 사고, 인프라를 구축하다 보니 전주시가 짊어진 지방채가 어느덧 6,000억 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당장 올해만 해도 빚과 이자를 갚는 데 거의 1,000억 원에 가까운 예산이 쓰여야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작 시민들의 삶을 보듬어야 할 민생정책 예산이 300억 원 이상 깎이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올해 전주시 총예산은 전년 대비 1.6%인 435억 원이나 감소하여 근래 보기 드문 심각한 역성장을 기록했습니다. 2027년부터는 빚 상환 압박이 더 거세진다고 하는데 다가공원을 포함한 장기미집행 도시공원을 수용하기 위해 230억 원이라는 거대한 빚을 또 내야 하는 전주시의 어깨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전주시가 강제수용을 밀어붙이고, 천양정 재단이 이에 맞서 끝없는 길고 긴 소송으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남기는 공멸의 길이 될 것입니다.
이미 전주시는 가련산공원 사례에서 무리한 행정으로 소송에서 패소하며 행정력을 낭비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소송이 길어질수록 법적 비용과 지연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고 갈등으로 얼룩진 공원에서 시민들은 온전한 휴식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 132년 전 집강소 지혜 되살리는 상생계약

돈은 없는데 땅은 지켜야 하고 역사는 보존해야 하는 이 해법 없는 고차방정식 앞에서 전주시에 제안합니다. 우리 함께 132년 전 전라감영에서 민과 관이 손을 잡았던 집강소의 지혜를 오늘에 되살려 봅시다.
법조문을 조금만 유연하게 들여다보면 「도시공원 부지사용계약」이라는 공존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고을 수령과 농민군이 권한을 나누어 가졌던 집강소처럼 땅의 소유권은 300년 넘게 이 산을 지켜온 천양정 재단에 그대로 두십시오. 대신 전주시는 단 한 푼의 돈도 들이지 않고 부지 사용권을 확보하여 관리권을 가지면서, 다가산을 시민들이 영구히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열어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전주시는 당장 내야 했던 230억 원의 빚 폭탄을 백지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낀 귀한 혈세 230억 원을 전주의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고, 홀로 사는 어르신들을 돌보며, 소상공인들의 한숨을 닦아주는 민생 예산으로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예산을 아끼는 것을 넘어 일방적인 강제수용이라는 행정 대신 대화와 타협으로 지역의 난제를 해결한 대한민국 민관 협치 행정의 가장 아름다운 모범 사례로 전주의 이름이 다시 한번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 역사․행정이 손 잡는 아름다운 숲 기대하며

천양정 재단은 땅을 지키겠다는 사리사욕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전주시의 재정적 부담을 함께 나누고 태조 이성계의 기상과 동학 농민군의 피, 그리고 집강소의 협치정신이 살아 숨 쉬는 다가산의 서사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간절한 호소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은 결국 사람의 온기가 담긴 행정의 유연성입니다.
우리 재단은 다가오는 미래에 전주시가 빚더미 위에 세워진 차가운 콘크리트 공원이 아닌 역사와 행정이 따뜻하게 손잡고 만든 상생의 숲을 시민들에게 선물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전주천의 바람을 맞으며, 300년 역사의 품격과 유능한 행정의 지혜가 나란히 걸어가는 격조 높은 전주의 내일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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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시 “강제수용”-(재)전주천양정 “공존의 길 만들어야”
↑↑ 전주 천양정과 입구 간판

다가산은 재단법인 전주천양정 소유지다. 과거 전주팔경 중 하나인 다가사후(多佳射侯)는 다가산 자락에 과녁을 세우고 활 쏘는 풍경이 아름답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다가산과 천양정은 한 몸이나 다름없다.
천양정은 1712년 창건된 곳으로, 당시 지역 유지께서 다가산 일대를 기부하면서 활터를 세우게 된 데서 시적되어 그 역사는 314년에 이르고 있다.
최근들어 전주시는 도시공원 일몰제 시행으로 다가산 정상 부분을 제외, 공원부지에서 해제하고, 정상과 일부 진입로 매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재)전주천양정은 총회를 개최, 부결돼 전주시에 결과를 통보했다. 전주시는 해당 토지를 강제수용 추진한다는 입장으로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천양정에서는 해마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궁도대회, 전국남녀궁도대회 등 각종 대회가 열려 활쏘기의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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