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기획/특집

전주․완주 110景 44> 조경단비肇慶壇碑-죽림천엽竹林千葉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입력 2026.10.05 10:15 수정 2026.10.05 10:15

▮글: 정복규 언론인
▮그림: 정미정 작가

87. 조경단비肇慶壇碑
○…전주 건지산에 자리한 조선왕실 시조 묘역
↑↑ 조경단비肇慶壇碑. 그림 정미정 작가

조경단(肇慶壇)은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건지산(乾止山)에 있다. 조경단비(肇慶壇碑)는 조경단(肇慶壇) 안에 세워져 있는 비(碑)를 말한다. 전북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이곳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 이한(李翰)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한(李翰)은 바로 전주이씨 시조이다.
 
조경단과는 별도로 전주시 전동 한옥마을 안에 있는 경기전은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 여겨 세운 전각 이다. 경기전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있다.
조경단비는 조선왕실 시조의 묘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9년 10월에 세워졌다. 시조 이한의 묘가 있는 건지산에 정방형의 제단을 쌓고 고종의 친필로 대한 조경단비를 세웠다. 광복 후 조경단 일대의 광대한 왕실 소유 땅 중에서 70만여 평을 전북대학교 부지로 불하하여 인재 양성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이한은 신라시대 사공(司空)이란 벼슬을 지냈다고 하는데, 정확한 생몰 연대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 뒤 그의 조상들을 모신 건지산 묘역을 각별히 수호하였다. 역대 왕들도 정성을 다해 보호하였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태조의 영정과 조상들의 위패를 옮기기도 하였다.
 
광무 3년(1899) 지관의 도움을 받아 지금 있는 자리에 단(壇)을 쌓고 비석을 세워 묘역을 새로 정비하였다. 경내 주변에는 돌담을 쌓고 동서남북으로 문을 두었다. 조경단 남쪽에 있는 문에서 20m 떨어진 곳에 비각을 세우고 그 안에 대리석으로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이 비는 1899년(고종 3년)에 윤용구(尹用求)가 칙서를 받들어 쓴 것이다. 당시 고종은 친히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라고 쓴 비를 세웠다. 음기(陰記)도 고종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이는 조경묘에 이어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한층 더 구체화하는 조치였다.
 
비문에 따르면, 전주부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 건지산(乾止山)이 곧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선조 사공공(司空公)의 묘소라고 되어 있는데, 예조(藝祖)가 창업하던 초기에 그 산에 봉해져 수호(守護)했다고 한다. 영조(英祖) 때에 이르러 묘역(墓域)과 묘지(墓誌)를 조사하였고, 1899년 봄에 왕자봉(王字峰) 아래 진성(辰星)을 등진 언덕을 봉심한 후 영건청(營建廳)을 설치하여 제사 지낼 터를 닦고 단을 세운 후 조경(肇慶)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 비문의 탁본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시기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고려 말 학자 권근(權近)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큰 진산(鎭山)이 남북을 갈라놓니, 완산(完山)이 가장 기이하도다(巨鎭分南北 完山最是奇), 천년의 왕기(王氣)가 모였으니 일대(一代)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千年鍾王氣 一代啓鴻基)”
 
과연 전주이씨의 후손들은 시조 이한(李翰)의 묘를 잃고 500년 뿌리내려 살다가 이안사(李安社) 대에 전주를 떠나 함경도로 갔다. 조선 건국 이후 영조 47년 이곳에 위패를 봉안했을 뿐이다. 그 뒤 광무 2년(1899)에 한 나무꾼이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결국 1000년 뒤 시조의 묘를 찾게 되었다.
 
조경단 조성에 대한 논의는 건지산 기슭에 시조 이한공의 묘소가 있었다는 구전을 바탕으로 영조 대에 이미 있었다. 땅을 파고 묘역을 찾아보려 했으나 허탕을 치고 중단되었다. 다만 근방의 민묘를 철거케 하고 감독관을 두어 건지산 일대에 푯말을 박고 사냥과 땔감 채취를 금하였다.

그 뒤 구체적인 조경단 건립은 고종 때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1898년(광무 2) 의정부 찬성 이종건이 건지단에 시조 단을 세울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이듬해 궁내부특진관 이재곤(李載崑)을 조경단봉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으로 임명하였다. 전주에 내려온 이재곤은 건지산에 나아가 왕자봉 아래 동쪽에 산을 등진 기슭에서 봉분의 형태를 찾았다.
 
이곳에는 상하에 묘가 있어 상묘․하묘라고 불려왔었다. 당시 전라도감사는 이완용(李完用)이었다. 그리하여 묘 앞에 단을 쌓고 고종이 친필로 쓴 조경단비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것이 전주동물원 못 미쳐서, 덕진공원에서 나오는 길과 송천동에서 오는 길이 만나는 부근에 있는 조경단이다. 조선왕조는 말년에 와서야 시조의 묘소를 갖게 된 셈이다.

전주이씨 조경단 대제는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해마다 4월경에 이곳 조경단에서 거행된다. 전국 경향각지에서 많은 종친들과 함께 시조 사공공(司空公)과 시조비(始祖妣) 경주김씨에게 대제를 올리는 것이다.
 
한편 전주 덕진공원을 전통공원으로 조성하려면 인근 조경단, 오송제와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한(李翰)의 묘역인 조경단과 멸종위기 식물이 자생하는 오송제를 인근 덕진공원과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옥마을 중심의 전주 관광의 외연이 확대되고 70년 동안 공원지구로 묶여 개발이 지연된 덕진 일대 인근 상권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조선원보략(國朝璿源譜略) 선공묘지(先公墓地)에 궐문(闕文)이 있는데 “전주(全州)가 국가 풍사(豐師)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 건지산(乾止山)이 곧 사공공(司空公)의 묘소라고 되어 있다.
 
읍지(邑誌)에는 “사공공의 묘소가 이곳에 있는데, 우리 예조(藝祖)께서 창업하던 초기에 그 산에 봉해져 수호(守護)하고 해당 도신(道臣)에게 봉심(奉審)하도록 명하였다. 영조(英祖) 때에 이르러 묘역(墓域)과 묘지(墓誌)를 살펴서 조사했는데- 몇 자 판독 불능- 민가의 무덤과 거리가 가까워 감관(監官)과 산지기를 두어 벌목과 방목을 금하였다”고 되어 있다.

------------------------------------------------------------------------------------------
88. 죽림천엽竹林千葉
○…완주 상관 죽림리의 아흔아홉 구비를 비유
↑↑ 죽림천엽竹林千葉. 그림 정미정 작가

죽림천엽(竹林千葉)의 현장은 전북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에 있다. 죽림천엽(竹林千葉)은 ‘죽림리의 아흔아홉 구비’를 말한다. 천엽(千葉)은 일천 천(千), 잎사귀 엽(葉)으로‘여러 겹으로 된 꽃잎’을 의미한다. 여기서 천엽(千葉)은 ‘아흔아홉 구비’를 비유해서 표현했다. 죽림천엽은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철로가 깔리고 개발이 되면서 옛 모습은 대부분 없어졌다.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에서 서쪽으로 나가 상관천을 건너면 공기골에 들어선다. 그래서 죽림리(竹林里)는 공기동(孔基洞, 孔器洞)이라고도 한다. 공기골(인근 동서학동도 해당)은 아흔아홉 고개의 골짜기를 지녔다. 높은 골짜기라서 산새의 울음소리와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신선들이 풍월하는 듯했다.
 
죽림리는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붓과 더불어 한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에는 창암이 40여 년을 서예에 전진하며 살던 집터가 보존돼 있다. 초명은 규환(奎奐) 또는 규환(奎煥)이었다. 그러나 학문, 교우, 취처 등 세 가지가 늦었다는 뜻으로 삼만(三晩)이라 개명하였다. 이삼만은 중년이 되면서 공기골 골짝에 찾아 들어와서 그윽한 묵향 속에서 필봉을 가다듬어 유수체를 이룩하고 제자들을 지도했다.
 
창암은 혹독한 수련으로 예술적 경지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글씨 쓰기에 몰두하여 벼루를 세 개나 구멍을 냈다. 이삼만은 어렸을 때 당대의 명필로 알려졌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다. 초서에 능했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창암은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로 지칭되는 추사 김정희에 비길만한 인물이다. 추사는 북학의 한 계통으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직접 수용하고 그것을 조선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개혁적인 유학파 인물이었다. 반면 창암은 혹독한 자기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낸 국내파 지식인이었다.

창암은 스스로 진나라 주정과 당나라 유공권, 그리고 신라시대 김생의 글씨를 토대로 글씨 공부를 하였다. 또한 위진시대 고법을 근간으로 하여 자신의 필법을 확립해 나갔다. 창암은 서예를 단순한 기예에 머물지 않고 학문적으로 바라보려는 진지한 태도를 가졌다.
 
전라도 도처에서 그가 쓴 편액(扁額)을 볼 수 있다. 경상남도 하동의 칠불암(七佛庵)의 편액(扁額), 전주판(全州板) ‘칠서(七書)’ 전주 옥류동(玉流洞, 현 교동) 월당지반(月塘池畔)의 바위에 새긴 ‘취리건곤한중일월(醉裡乾坤閑中日月)’과 옥류동 고개바위에 새긴 ‘연비어약(鳶飛魚躍)’이란 큰 글자 등이 있다.
 
그가 자신의 회갑 때 쓴 자서문(自敍文)에 의하면 ‘우연히 진(晋)나라 사람 주정(周珽)이 쓴 비단 바탕의 글씨를 얻어 당나라 때의 여러 명필에 못지 않다고 여겼다. 또한 서울에서 류공권(柳公權)의 전적(典籍)을 얻게 되어 옛사람의 붓을 다룬 뜻을 밝히고, 만년에는 신라 김생(金生)의 글씨를 얻어 옛사람의 글씨 획이 실하고 슬기로움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해 창암은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삼만과 동시대를 살았던 당시 조선의 대표적 명필은 호서(湖西)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남의 창암(蒼岩) 이삼만(李三晩), 강서(江西)의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1772∼1840) 등을 꼽는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부성을 지날 때 지금의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동 창암의 처소에 들러 창암을 만났다. 그 뒤 추사는 귀양살이 9년만인 1848년(헌종 14) 12월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창암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뜬 이듬 해였다. 

추사는 그 후손을 찾아 문상하고 묘소에 비문을 남겼다. 이삼만은 78세로 일생을 마치고 완주군 구이면 평촌 하척부락에 묻혔다. 이삼만은 53세에 부인 김해김씨와 사별했는데 슬하에는 딸만 셋이었고, 가계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아랫자골 후록 창암의 묘소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묘비가 있었다고 전한다. 묘문음기(墓文陰記)는 비치지 않고 묘표만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비 앞면에는‘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명필창암완산이공삼만지묘)’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公筆法冠我東 老益神化 名播中國 弟子數十人 日常侍習 亦多薦名于世 取季弟子爲后’(공의 글씨는 우리나라 으뜸으로 노경에 들어 더욱 신묘해져서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제자 수 십 사람이 날마다 모시고 글씨를 배워 세상에 그 이름을 드날린 자 또한 많았다. 막내 동생의 아들로 뒤를 이었다)라고 끄여있다. 그러나 묘문음기(墓文陰記)는 비치지 않고 묘표만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이삼만은 우아한 문장과 법통 있는 글씨를 쓰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에서 청아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서도는 심오한 사상과 고고한 경지에서 이뤄졌다. 추사 김정희 글씨와 더불어 높은 수준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글씨 쓰는 사람들의 정신과 자세에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몇 년 전 정읍시는 창암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유묵첩(遺墨帖)’을 발간했다. 이 책은 ‘창암 이삼만 선생의 생애’와 ‘창암의 서도와 예술 세계’, ‘유묵첩 발간의 의의와 후속대책’, ‘연비어약(鳶飛魚躍)’ 등 86점의 주요 작품과 해설편으로 구성됐다.
 
창암의 일대기에는 정읍시 부무실 출생과 성장, 50세 전후 전주 교동 이주, 60대 이후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에서 78세에 작고한 후 구이면 평촌리에 묻혔다고 밝혔다. 창암은 갈필(葛筆),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 등 토착 필기구를 직접 개발하여 사용했다.


저작권자 시사전북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