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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개남 순국 터 ‘서교장’ 어디에 있나

시사전북닷컴 기자 입력 2018.03.09 14:37 수정 2018.03.09 02:37

박대길 박사의 얼기설기/ 시사전북 2018.3월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대표적인 인물은 누가 뭐라 해도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의 주인공 전봉준이다. 그리고 전봉준과 함께 5대 지도자로 존경받는 분들이 바로 손화중과 김개남, 그리고 김덕명과 최경선이다. 전라도 고부와 태인, 그리고 김제 등지에서 혁명을 준비했던 이들은 동학의 평등사상과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개벽사상, 그리고 외세의 침탈에 당당하게 맞서는 민족주의에 의기투합하였다.
왕조국가의 유교적 신분질서와 지배질서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의 의식과 실천의지는 결국 무력혁명으로 나아갔고, 전주성 점령과 역사 이래 최초로 시행된 집강소 민주자치라는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군과 결탁結託한 정부군에 처절하게 패배하며 이들의 꿈과 희망은 막을 내렸지만, 다섯 지도자의 최후는 너무도 당당하였다.
1894년 12월, 거의 같은 시기에 체포당한 전봉준과 손화중, 그리고 최경선과 김덕명은 서울로 압송당한 뒤 권설재판소[임시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그래도 법정 진술과 언론보도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는데,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모두 자신들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러나 이들이 교수형을 당한 구체적인 장소와 시신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최경선과 김덕명은 시신을 수습하여 실묘實墓로 조성한 반면, 전봉준과 손화중은 가묘假墓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김개남은 서울로 압송은 물론 재판마저 받지 못하고 전주에서 즉결처분을 받았다. 교수형이 아닌 참수斬首를 당하였고, 머리는 서울로 보내져 서소문에 효시梟示된 후 다시 전주로 보내져 효시되었다. 이와 함께 머리를 제외한 육신肉身의 행방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나마 김개남 사후死後 101년이 지난 1995년에 후손과 뜻있는 인사들이 가묘를 조성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맞아 김개남의 순국 터에 대한 조명이 있었다. 그 당시 김개남의 순국 터를 취재한 경향신문에는 서교장西敎場, 장대將臺, 숲정이, 공북루拱北樓 아래, 초록바위 등 모두 다섯 곳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면서 어느 곳이 순국 터인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후 어떠한 근거도 제시되지 않은 채, 어느 순간부터 김개남의 순국 터는 초록바위로 기정사실화되었다. 여기에는 후손의 증언이 한 몫 했을 수도 있다. 할머니에게서 들었다며, 초록바위를 강하게 주장한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감히 “초록바위가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전주시가 발주한 연구용역에서도 근거 없이 ‘초록바위’로 명시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분위기에 의문을 갖고 자료를 뒤졌다. 그 결과 김개남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며 현장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 감사의 보고서를 찾았다. 동학농민혁명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일본군은 조선정부에 주요 지도자를 사로잡았을 경우에는 즉결처분이 아닌 서울 압송과 재판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 결과가 김개남보다 하루 먼저 체포당한 전봉준을 비롯하여 그 뒤에 붙잡힌 손화중과 최경선, 그리고 김덕명의 서울 압송과 재판이었다. 당연하게도 김개남 역시 서울 압송과 재판이 예정되었다. 그런데 전라 감사는 즉결처분해 버렸다.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 추궁이 예상되었으므로 전라 감사의 보고서는 사실 그대로를 담을 수밖에 없다.
일본군이 기록한 자료에 포함된 전라 감사의 보고서에는 처형 장소가 ‘서교장’으로 명기되어 있었고, 1942년에 발간된 『전주부사』에는 ‘장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자료에는 ‘공북루 아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이전인 1872년에 제작된 전주부 지도를 보니, 이 3곳은 같은 장소였다. 서교장은 서쪽에 있는 군사 훈련장이고, 장대는 군사훈련장 안에 있는 지휘소이며, 공북루는 전주성의 북문 밖에 있는 서교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3곳은 모두 같은 장소를 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군사훈련장이면서 천주교도의 사형장으로 사용했던 서교장을 ‘숲정이’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김개남의 순국 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숲정이로 밝혀졌다.
문제는 초록바위였다. 그 당시 기록과 후대의 기록 모두 서교장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초록바위가 김개남의 처형 터로 구전되어 왔느냐.”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료 어디에도 이와 관한 기록은 없었다. 그런데, 서교장이나 장대라는 지명이 전주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대신에, 언제부터 숲정이가 천주교도의 대표적인 순교지로 전주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는지 알아보니, 숲정이에 ‘천주교인순교지지天主敎人殉敎之地’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진 1935년 이후였다. 그때부터 천주교회는 숲정이 일대를 성역화의 장소로 정하고, 1960년대 초반에는 해성중․고등학교를 세우고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로 가꾸었다.
초록바위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였을 당시에, 전주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 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학의 전주접주 서영도徐永道가 1895년 봄에 공개 처형을 당한 곳이었다. 이로 인해 숲정이는 천주교도의 대표적인 순교지로, 초록바위는 서영도가 아닌 김개남의 처형지로 회자된 것이다. 그 당시 문헌과 후대의 기록이 서교장이나 장대, 공북루 아래로 명기된 김개남의 순국 터는 숲정이라 부르던 현재의 동국아파트 일원이라는 것이 지극히 타당한 결론이었다. 김개남의 순국 터에 관한 필자의 연구는 2017년 2월, 공인된 학회지에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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